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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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작가상에 빛나는 김혜나의 두 번째 장편소설 <정크>를 2018년에 읽고 나서 참으로 징글징글하게 징징거린다고 불평을 하고는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행크 치나스키가 등장할 것인가 하고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있다. 행크 치나스키? 찰스 부코스키가 쓴 일련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골통 남자다. 많이들 아실 듯. 네 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 작품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X영이 조금은 행크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 남성 동성연애자라는 것. 그렇다. 이 책은 퀴어 문학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책 뒤에 실린 평론가 강지희의 작품해설 앞부분을 보면, 남성 동성애자의 침대를 놀라운 상상력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확장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 창비가 선택한 평론가가 하시는 말씀이니 틀림없는 진실이겠지만, 솔직히 동성애자들이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 그들이 동성애를 하건 말건 그건 그들 소관일 뿐이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나는 더 이상 강지희의 놀라운 크레센도를 읽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책은 그냥 퀴어 소설집이고, 동성애자도 그냥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다만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을 뿐이다.
  내가 처음 읽어본 퀴어 소설은 윌리엄 S. 버로스가 쓴 <퀴어>였고, 두 번째가 이것도 퀴어 문학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모두에 얘기한 김혜나의 <정크>였으며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셔우드의 <싱글 맨>에 이어 네 번째 작품(집)이 된다. 아, E.M 포스터의 <모리스>가 퀴어 소설의 조상님 쯤 되려나? <퀴어>도 그렇고 <정크>도 그랬는데, 박상영의 작품집에서도 제일 앞에 실린 <재희>도 마찬가지로 '거칠다.' <재희> 때문에 행크 치나스키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강지희의 평론에 쓰여 있는 줄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박상영의 작품을 퀴어 문학으로만 읽을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퀴어 소설이라는 측면 또는 희소성 때문에 독후감을 쓰며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상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이기 전에 연애소설이다. 아쉽게도 연애 중, 흔히들 말하기를 ~ing 형은 한 편도 없고 다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다. 어차피 연애소설이란 건 근본적으로 이별과 상처, 더 나아가 추억에 관한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중단편도 마찬가지다.
  잘 쓴 연애소설 네 편을 읽을 수 있는 기회. 난 더 이상 퀴어 소설이니 레즈 소설이니 하는 말은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다. 그냥 연애소설이이라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읽어본 어떤 남성 작가도 사랑과 이별과 추억과 기다림과 아픔과 상처를 박상영처럼 감각적으로 쓴 것을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의 미덕은 박상영이 꾸려내는 이야기의 행렬matrix이 우울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고 슬픔의 영역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중단편 소설의 줄거리를 공개하는 우스운 일은 하지 못하겠다.
  근데, 본문이 309 페이지에서 끝나는 이 책의 편집이 매우 불량하다. 처음 책을 들춰보고 겉표지를 확인했다. 이거 창비가 만든 책 맞아? 맞다. 한 페이지에 열아홉 줄1. 한 줄에 원고지로 30자. 총 본문 302쪽. 200자 원고지로 계산해보면 19*30*302/200 = 원고지 861 매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신기의 편집술을 과시했다. 책의 여백을 생각하면 850매도 들지 않았을 거다. 박상영도 마찬가지다. 책을 내주겠다고 해도 좀 기다리라고, 아직 책을 만들 분량이 아니라고 했어야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쉬운 말로 양심불량이라 일컫는다. 이렇게 네 편의 중단편, 원고지 850매 정도를 모아놓고 정가 14,000원, 10% 깎아서 12,600원을 받고 싶을까? 이런 편집을 하면 불쌍한 건, 뭐 독자들이야 돈을 좀 더 내야 하는 거밖엔 미치지 않겠지만, 제일 불쌍한 건 열대우림의 나무들이다. 309쪽 읽는데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책을 만들기는 해야 하겠는데 너무 얇으면 보기 뭐 하니까 책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편집을 했으리라. 에라 이.... 이 책 나오기 한 달 반 전, 창비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19. 여름>호에 4년 만에 신경숙의 작품을 실었다. 이런 편집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양심이 집나갔던 시기. 결국 창비도 신자유주의의 기수가 되고 말았던 거디었던 거디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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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출판사 창비에서 나온 같은 사이즈의 <밀크맨>은 한 쪽에 스물세 줄로 편집했다. 네 줄 차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시지? 무려 20퍼센트 이상, 본문을 240여쪽으로 만들 수도 있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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