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의 색 오르부아르 3부작 2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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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은행장의 아들 에두아르 페리쿠르. 열흘만 더 지나면 종전협정에 서명을 할 터인데 얼마 남지 않은 전쟁에서 기어이 공을 세워 진급을 하고 싶은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의 명령과 조작에 의해 벌어진 소규모 전투 도중 어딘가에서 팽팽 날아온 파편에 맞아 아래 턱 전부와 혀를 날려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오르부아르>의 후속작품. 전편에서 에두아르가 거의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착한 누나였으나 어려서부터 양가집 딸로 교육받아  속마음은 어땠을지언정 누구에게나 늘 친절을 베풀어왔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선량한 ‘구식여자’ 마들렌. 마들렌은 이미 <오르부아르> 시절에 생긴 거 딱 하나 보고 동생 에두아르의 철천지원수인 앙리 도네프라델과 결혼해 아들 폴을 낳고 이혼한 상태이다. 주위 사람들은 에두아르가 베르됭전투에서 전사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전쟁 후 고통스럽고 긴 치료를 마치고 원수이자 매형인 앙리에서 복수를 한 후에 호텔 현관 앞에서 하필이면 아버지의 승용차 앞으로 몸을 날려 자살한 시점에서 별로 지나지 않은 1927년에 소설은 시작한다. 에두아르가 죽은 후 날이 갈수록 골골하던 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 씨도 삶의 의욕을 조금씩 놓기 시작하더니 몇 십 년 전에 모교인 국립고등공예학교 졸업생 가운데 아깝게 수석졸업의 영예를 놓쳤던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조금씩 권한을 대행시키다가 어느 새 거의 전적으로 경영을 맡기는 수준에 이르렀고, 평생 워크홀릭 상태에 있던 사람이 손에서 일을 놓으면 대개 그러하듯이 어느 날 실없이 그만 숟가락 놓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페리쿠르 은행장의 죽음에 파리의 신문은 “프랑스 경제의 한 상징이 사라지다.”는 등을 1면에 대서특필했으며, 춥고도 추운 장례식 날에는 가스통 두메르그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였는데, 작품의 중반에 가면 세계적인 공황이 닥친다면 마르셀 페리쿠르가 세운 것과 같은 중소은행은 도무지 버틸 방도가 없다고 평가한다. 중소은행의 총수의 장례식에 대통령이 떠? 좋다, 뭐. 두메르그 대통령과 마르셀 페리쿠르가 평소에 형, 동생 먹었을 수도 있겠지.
  페리쿠르관館, 페리쿠르 저택이라고 불리던 집에서는 할아버지 마르셀, 엄마 마들렌, 아들 폴, 가정교사 앙드레 델쿠르, 여자 집사 수준의 절세미녀 하녀 레옹스 피카르 양, 정원사 레몽과 요리사와 하녀들이 있었으며, 하녀들은 전래대로 지붕 아래 다락방, 가정교사 앙드레는 3층의 작은 방에 거처를 정했다. 일찍이 페리쿠르 씨가 마들렌의 재혼 상대로 점찍은 후계자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마들렌은, 은행을 위해 자기 대신 경영을 해줄 남편을 얻기 위해 결혼은 할지언정 더 이상 자식을 낳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전남편 앙리를 떠올리며 정부는 몇 명을 두어도 좋지만 절대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었다. 그리하여 주베르가 결혼을 기다리는 중에 어처구니없게 마들렌은 가정교사 앙드레와 우연히 한 침대에 들게 되고, 그제서 난생 처음으로 성적 쾌감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보다 열댓 살이 많은 주베르 씨가 눈에 들어올 수는 없는 일. 앙드레의 침실이 있는 3층으로 밤마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마들렌의 행적을 본인만 모르고 모든 이들은 기대에 넘쳐 발개진 얼굴을 하고 층계를 오르는 마들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러니 결혼이 이루어 질 턱이 있나. 이런 작은 소동이 지나가면서 그나마 적수공권에서 일종의 자수성가를 했다고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아직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고용인이라는 한계에 갇힌 주베르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것도 머리 좋고 추진력 있으며 거기다가 인내심과 기획력까지 겸비한 인물이.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눈을 감은 할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 평소에 할아버지를 그리도 따랐으며 할아버지 역시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손자가 함께 놀자고 요구를 할 때 한 번도 거절해본 적이 없었던 추억을 갖고 있는 폴이 그의 길지 않은 삶에서 완전히 조부를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땠을까. 아니면 평상시에 손자 폴 페리쿠르에게, 또는 유일한 계승자 폴로 대변하는 페리쿠르가家를 향한 끊임없는 저주가 페리쿠르관 위에 떠돌고 있어 누가 슬쩍 밀었을까. 그래서일까. 검은색 천개를 아래 할아버지의 관이 빠져나올 때를 맞춰 저택의 3층 꼭대기에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흰 셔츠를 조금 풀어놓은 폴이 양 팔을 벌린 채 위태롭게 서 있다가 그만 자유낙하를 해버린다. 폴의 몸체는 검은 차일, 천개에 한 번 튕기고 다시 붕 떠오르다가 할아버지의 단단한 참나무 관에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박히고 만다. 내출혈로 인해 귀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하고 마침 가까운 자리에 서 있던 의사 푸르니에 박사가 얼른 폴에게 다가가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앰뷸런스가 도착해 엄마 마들렌, 앙드레, 레옹스와 함께 병원으로 이송하는 등 대통령까지 참석한 장례식은 엉망이 되고 만다. 폴은 며칠 만에 깨어나긴 했지만 이후 대마비對痲痺 상태, 즉 영원히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원래는 장례행렬에 마들렌과 폴의 뒤에서 줄레줄레 따라갈 예정이었던 마르셀의 동생 샤를 페리쿠르가 난데없이 상주가 되어버린다. 샤를은 몇 선을 거친 국회의원으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들의 뜻을 모아 정치적 진영을 초월해 많은 사람을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무슨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따지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로 선거 때마다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은 바람에 형 마르셀의 지원을 받아야 했으나, 이런 종류의 사람과 주위 인물들이 보통 생각하는 건 정작 도움을 준 은인의 공을 폄하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에게 가혹했다고 하는 원망의 마음을 갖는 일이다. 실제로 샤를은 좀 덜하지만 그의 처, 나중에 난소암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오르탕스는 마르셀과 그의 딸에 대한 악감정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다.
  이 작품은 전작인 <오르부아르>와 비슷하게 주인공에게 누가 악행을 하고, 이것을 되갚아 주는 형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당이 존재해야 한다. 누굴까. 앞에서 본 귀스타브 주베르씨. 약혼까지 이르렀다가 파혼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흐지부지된 50대 초반의 남자. 아무 이유 없이. 사생활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그냥 소문만 지저분하게 나지 않게 해달라는 건 비단 주베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들렌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앙드레와의 관계가 크게 걸림이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람. 그는 이 수치의 경험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한다. 대신 마음속에 꽉 박아두겠다고 맹세한다. 게다가 작품이 더 진행하면 아직도 마들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 마들렌은 폴의 불구로 인해 마음이 약해진 것과 절묘하게 분위기가 어울려 주베르씨가 착각에 빠져 키스를 하게 된다. 이때 마들렌은 주베르에게 매운 귀싸대기를 날려 주베르의 자존심을 뒤꿈치로 완전히 짓이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마들렌도 실수였음을 자각하고 그래서 사과의 편지로 화해하는 듯했으나 그런 건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법. 가뜩이나 주베르씨는 페리쿠르 가문에 수십 년 간 기껏해야 부잣집 마름 같은 대우만 받아왔다는 피해의식이 가득한 상태였으니.
  문제는 돈이다. 역시. 페리쿠르 씨의 유언장 낭독. 딸 마들렌에게 600만 이상의 현금과 저택. 참고로 현금이라고 하는 건 단위가 프랑스 프랑이며 1년 이내 현금화가 가능한 단기 채권과 주식 등을 포함한다. 손자 폴에게는 21세까지 마들렌이 관리하는 국채 3백만. 아우 샤를에게 현금 20만, 전사한 아들 에두아르를 기념하기 위해 참전용사클럽에 20만,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10만, 샤를의 지독하게 못생긴 두 딸 로즈와 자생트에게 각각 5만, 조케클럽과 서부자동차클럽과 기타 몇몇 클럽에 각각 5만, 저택의 직원 일동에게 1만5천을 유증한다. 이를 평생 돈 관리 업무에 매진해온 귀스타브 주베르 씨가 평가하기를 마르셀 페리쿠르 씨가 죽으면서 아우 샤를의 따귀를 후려 친 격이며 자신한테는 적선을 베풀어주었다고, 즉 한 푼 던져주었다고 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봐도 귀스타브와 샤를에게는 마르셀 페리쿠르의 남은 재산을 더 빼앗을 조금의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여기에 앙드레 델쿠르. 이 청년은 작가, 아니면 적어도 저널리스트 또는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자인데 돈에 대해서 거의 청렴한 수준이고, 명예욕은 있으나 마들렌을 제외한 다른 여성을 탐하는 것 같지도 않으며, 심지어 마들렌에게조차도 그리 큰 욕정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폴이 추락해 이제 더 이상 아이에게 가정교사 역할을 할 수도 없는데 그냥 저택에 머무는 것은 페리쿠르관에 있어야 봉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마들렌이 주선을 해 파리에서 가장 판매부수가 많은 일간지 “수아르 드 파리”지 1면에 페리쿠르 씨의 장례식 장면을 취재해 실을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날 아주 딱 맞춰 집의 손자 폴이 3층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바람에 현장취재도 못하고 함께 병원으로 가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비록 밤을 새워 현장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력 하나로 장례식 기사를 써 생생한 르포 기사를 신문에 게재할 수 있어서 신문사 사장 쥘 기요토씨로 하여금 그가 기자로서의 장점 두 가지, 자기가 못 본 사건을 묘사하는 능력과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독자는 돈과 관련해 마들렌을 망하게 하는 원흉들로 귀스타브 주베르, 샤를 페리쿠르, 앙드레 델쿠르를 지목하고 이들이 서로 연계해서 페리쿠르가를 몰락시키리라고 짐작을 할 수 있으나, 여기까지 읽었음에도 풀리지 않는 건 왜 폴이 할아버지 장례식 날, 많고 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며 딱 그날을 골라 3층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더 읽어야 한다. 이 정도면 독후감을 읽는 분께 충분히 호기심을 품게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쯤에서 마감하려 한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에서 곱게 자란 규방의 여인이 혼자 험한 세상 속의 악당들을 처치할 도리는 없을 것. 그리하여 한 명의 흑기사가 등장하니 뒤프레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평민 신분으로 전편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어떤 연대를 누구와 맺는지,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 한 번도 어긋나지 않고 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차례대로 해치우는지, 또 내가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악당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처치하는지 궁금하시지? 간단하다. 읽어보시면 된다. 6백 쪽이 넘는 장편이지만 재미있어서 후다닥 읽어치우게 된다. 그러나 진짜로 읽어보시기 전에 명심할 것은 진짜 인생은 이들의 활극과 달리 절대로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 슬프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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