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인 척, 아닌 척
박금산 지음 / 뿔(웅진)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재미있는 우울한 소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서사의 진중한 재미라기보다 곳곳에 배치한 경쾌한 스냅들을 이야기하는 거다. 이 책이 2012년에 나왔는데, 당시 작가들, 물론 지금도 많이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들과 책의 편집인들이 가장 신경 쓴 것이 혹시 독자들의 가독성 아니었나 싶다. 여유로운 편집에 널찍한 행간과 자간, 짧은 대화 등은 280여 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순식간에 읽어치우게 만든다.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번역해 우리 작가 한강에게 맨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게 한 데버러 스미스가 한국 소설의 역자translator로 갖는 이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가독성, 이 가운데서도 ‘짧은 장편’인 점을 꼽았던 것이 기억난다. 전편을 번역하기 위해 다른 나라 문자를 영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소비하는 시간에 비해 반도 걸리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을 인터뷰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아직 <채식주의자>는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늦어도 3월엔 읽을 예정이다. 이젠 읽을 때가 됐다.) 박금산의 <존재인 척, 아닌 척>을 보면 꽤나 사연이 많은 등장인물 세 사람, 두 커플의 이야기 역시 매우 속도감 있게 진도를 뺀다. 그래서 후다닥 읽어낼 수 있는 미덕이 있지만 그렇게 읽고 나니,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책 읽기를 마쳤음에도, 진짜 책을 덮자마자 랩탑을 켜고 자판을 누르려 하고 있음에도 뭐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다. 이거 슬픈 일 아냐?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작 남은 건 별로 없는 현상. 이래서 소설은 조금 머리가 아파야 제 맛이다.
  주인공은 남자 김병호이며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작가는 김병호를 줄곧 ‘그’라고 부른다. 공무원 아버지는 봄이 오면 바다로 낚시를 다녔고, 할아버지는 일흔 살에 머리를 민 후 섬에 들어가 중처럼 멋진 죽음을 맞았다. 일곱 살 많은 형은 전방 하사관으로 근무하다 추석 특식을 지게에 지고 GP로 오르는 중에 아군이 깔아놓은 지뢰를 밟아 폭사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 면제를 받게 해주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어머니(그 당시에!)는 아빠하고 스키 여행을 가서 아빠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뜰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세상의 때가 왕창 묻은 내가 대강 책을 읽으며 짐작하기를, 군대에서 죽은 맏이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버지는 부정부패 공무원 비슷해서 차남 김병호가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해군사관학교를 가려 하는 걸 알고 나자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권할 정도의 뇌물을 챙겨놓은 것 같다. 그런데 왜 장남은 장교도 아니고 하사관으로 군복무 중에 죽었을까? 요트로 하는 세계일주와 육군 하사관이 어울려? 하긴 이런 거 다 아퀴가 맞으면 한국 소설이 아니긴 하다. 현재 아내와 별거 중으로 아들 림을 보모 김명임 씨, 남편과 사별하고 생계가 막막했던 여자로 다섯 살짜리 아들 키우며 문학 전공했고 교육학을 부전공한 40대 여자에게 월 25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함께 키우고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 2012년이라 밝혔는데,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월 250만 원 준다면 보모 하겠다고 나설 지원자가 한 250 미터쯤 줄을 설 거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하기 싫어 대학원에 진학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섰을 때 아내 이진진을 만나 결혼, 지금은 애 딸린 별거남이자 작은 회사의 오너 비슷해 보인다.
  이진진. 남편 김병호와 동갑. 열일곱 살 때 미대에 진학할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해보고 싶어서 유화 한 점을 그려 항공회사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움직이는 계단 같이 생긴 용dragon 그림을 그려 냈다가 덜컥, 상을 받은 재원. 대학 졸업하고 굴지의 회사에 입사 성공. 이제 며칠 후에 정식 입사하게 된 시점에 김병호를 만나 마음이 끌려서 출장 간 아버지 차 빌려 서울 외곽의 모처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차가 들썩거리도록 허겁지겁 흠흠. 이후 입사는 했으나 주 52시간 근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이라 애인 김병호와 제대로 된 데이트 할 시간도 없고, 정신 제대로 박힌 여자 직원들은 육아하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시점이면 도무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반면 후배 여자 직원한테는 범 같은, 깡패 남자 같은 선배 노릇을 하는 대신 상사한텐 천생 여자처럼 살살 애교부리며 뒤로 챙길 건 다 챙기는 ‘년’들은 승승장구하는 꼴을 보고 자신이 여자를 증오하는 여자가 되기 싫어 팍 때려치운다. 아, 부럽도록 질투난다. 그러면서도 아들 보모한테 월 300만 원씩 주자고 주장할 수 있는 여성 가장이 아무 대책 없이 앞으로 딱 4년만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적어도 시댁이나 친정 둘 가운데 하나가 막강한 재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게 집안에 아무 돈벌이 없이 고시 공부를 하다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난데없이 산골로 귀촌, 성공리에 자리를 잡아 남편더러 애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산골에서 살자고, 자기는 죽어도 다시 도시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다.
  소규모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김병호. 어느 날 외근을 나갔다가 갑자기 몇 년 전에 자기가 쓰던 피디에이를 판 Y시의 수협 구판장에서 일하는 신미애라는 이름의 여성이 문득 생각났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러다가 난데없이 한 때는 따오기 섬, 곡도라고 불렸던 백령도가 떠오르고, 생각난 김에 오늘 갔다가 내일 오자는 마음이 생겨 보모 김명임 씨에게 아들 림을 하루만 댁에 재워달라고 부탁해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사는 일 가운데 내 맘대로 되는 게 뭐 하나나 있나? 휴대전화를 배터리와 분리해 승용차 사물함에다 처박아 놓고, 차 문을 닫은 다음 정작 그가 가기로 결심한 곳은 신미애가 살고 있는 Y시. 급기야 고속열차도 아니고 무궁화호 막차에 오른다. 누구나 열차를 타면, 특히 그게 밤 열차라면 옆에 근사한 이성이 앉아 더 근사한 밤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런 행운은 거의 언제나 나를 외면한다. 늙은 남자가 신발을 벗은 채 앞좌석에 발을 올려놓고 잠을 청하는 걸 보고 그는 식당차와 다른 빈 좌석을 왔다 갔다 하며 밤을 보내고,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본 여객전무는 승무원을 시켜, 아니, 승무원은 고속열차의 경우를 칭하는 것이고 그냥 열차에선 차장이라고 한다니 차장이라 다시 말하자, 차장은 혹시라도 그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려 시도하다 실패하면 행패나 부리지 않을까 싶어(요샌 열차 문이 전동식이라 사람이 열 수 없단다.) 유난히 그에게 친절을 가장해 접근한다. 차장의 이름이 안영. 해녀 겸 소규모 밀수업에 종사하는 엄마와 밀입국 브로커로 재산을 불리고 진짜 돈이 생기자 온갖 여자 수집에 열을 올리는 아빠 사이의 외동딸이 아침에 퇴근해 Y시에 있는 집으로 가던 길에 역에서 그, 김병호를 만나 아침 식사로 장어탕에다 소주 세 병을 까고, 몽돌 해변에서 2차로 맥주도 마시고, 술김에 집에도 함께 간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안영은 열 번 만나기 전까진 절대 몸을 허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말했다시피 그는 하루 기한으로 여행을 왔고. 그리하여 둘은 맺어지지 않을 거 같지? 인생이 다 애초에 결심한 대로 살 수 있으면 그게 인생인가 어디. 안영의 집에서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이상李箱이 쓴 <날개>의 주인공처럼 그는 안영이 출근한 낮 시간 동안 그녀의 옷들을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심지어 팬티와 브래지어를 착용해보기도 하면서 열흘을 뭉개버린다. 드디어 열하루 째가 됐을 때, 둘은 근처 호텔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만리장성을 쌓게 되는데, 김병호는 안영에게 처자식 다 버리고 올 테니 우리 둘이 한 번 살아보자, 라고 호소를 할까?
  이래서 저 위에 내가 말하기를, 등장인물 세 명과 두 커플이 만드는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의 요지는 김병호의 삶, 그냥 한 번 저질러버리는 거, 아무 뜻 없이 되는 대로 한 번 해보는 일탈에 관한 것인데, 곳곳에 유머 코드가 잔뜩 숨어 있기는 하나 정작 읽어보면 장착되어 있는 우울의 크레모아, 정확한 군사 용어로 하자면 M18A1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잠복해 있어서 읽고나면, 글쎄 내 경우에만 그랬는지 몰라도 감정이 헤쳐놓은 벌집 모습으로 너덜너덜해질 수 있다. 물론 나는 책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조금도 말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결말이 언제나 독자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 하는 건 아니라는 점.
  이상해. 휴일에 독후감 쓰면 꼭 길어진다는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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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