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5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네 번째 읽은 애트우드. 이 가운데 가장 재미가 ‘덜’했다. 애트우드의 작품 출간 순으로 네 권을 나열하면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눈 먼 암살자>2000. 마거릿 애트우드의 정체성은 페미니스트이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시선으로 보면 여전히 개선시키고 싶어 할 대상일 정도이며, 만일 자신을 여성주의 운동의 대표 역할로 내세운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주인공인 화자 일레인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수준이다. 이 책이 비록 여성주의에 기초하여 씌었으며, 화자 ‘나’가 소설가가 아닌 화가임에도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다분히 자기고백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나’ 일레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원조 캠핑카인 스터드베이커 차를 몰고 동북부 캐나다 지역을 유랑하는 곤충학자 슬하의 남매 가운데 동생이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가 토론토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이 되자 그곳에 정착한다. 화자는 토론토의 유년시절 부터 다 자라 벤쿠버로 독립해 옮길 때까지를 추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애트우드 자신이 유년기에 주인공과 비슷하게 북부 캐나다를 유랑하다가 겨울이 되면 도시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나’ 일레인은 지금 태평양을 면한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노년, 또는 적어도 갱년기의 성공한 화가. 그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낸 토론토의 미술 기획자가 화가의 고향으로 알려진 토론토에서 회고전을 하고자 하니 일차 왕림해주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여 토론토 방문을 결심해, 전남편 존의 작업실에서 프랑스 식 이불인 듀베로 몸을 둘둘 감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 전남편의 작업실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 없다. 한 때는 온갖 식기와 가전제품이 상대방의 얼굴과 몸통을 향해 비행한 적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극동과 극서지방이라는 거리와 그들 사이의 혈육으로 곧 의사자격증을 취득할 예정인 세라가 있어 서로의 증오는 이미 친구 관계 수준의 우정으로 순화되었으며, 예술가였던 존은 직업을 괴기영화 특수 분장으로 바꿔 촬영장으로 장기 출장 중이라 작업실이 비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토의 엄청나게 비싼 호텔비도 한 몫을 했고. 그러나 일레인의 유년시절과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보낸 토론토에 다시 도착하고 보니 지난 시절의 기억이 ‘나’를 덮쳐 온갖 상념과 허상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고양이 눈’이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도 꼬마들이 겨울이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의 한 종류다. 투명한 유리 안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꽃잎이 들어가 있는 구슬로 구슬을 들고 돌릴 때마다 안의 문양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1960년대까지는 상당히 드물었고 70년대 초엔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마 그걸 ‘사방 구슬’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긴가민가하다.) ‘나’ 일레인이 자신의 작은 가방 속에 보물처럼 예쁜 문양의 고양이 눈을 하나 담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지하실을 정리하다가, 부모의 집을 떠나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유리구슬로 ‘나’ 또는 ‘나’라고 읽는 애트우드의 유년시절을 대표하는 단어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대개 유년시절을 그리는 작품을 보면 어렴풋한 추억 속의 아련한 파편들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트우드는 그렇지 않다. 책 속에는 네 명의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나와 캐럴은 동갑내기이고, 코딜리어와 그레이스는 한 살 위다. 어린 시절의 한 살이란 매우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서 네 명의 우정과 권력은 가장 늦게 합류한 코딜리어의 정치권 안으로 수렴을 하게 되고, 권력을 쥐면 또 그것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코딜리어는 이름과 달리1 ‘나’ 일레인을 왕따 시키기를 즐겨하는 습관이 생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코딜리어의 언행은 거의 전부 어른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일레인의 입장에서 따돌림과 불공정한 행위는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였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코딜리어는 한 번 월반을 하고 북쪽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다시 일레인이 다니는 학교의 같은 학년으로 전학을 오게 된다. 사립학교에서 학교의 표상인 박쥐 문양에다 남자의 생식기를 그려놓은 죄목으로 퇴학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알고 보니 와중에 유급까지 당해 그동안 공부 잘 해 월반을 한 일레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 된 것. 이거 <도둑 신부>에서 본 거 같은 구도다.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고 인생마저 왕창 망가뜨렸던 친구가 몇 년 후 다시 눈앞에 등장하는 거. <도둑 신부>와 많이는 아니고 조금쯤 유사하게 일레인은 역전에 성공하여 원래 마음이 약했던 코딜리어가 일레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해가 감에 따라 거의 완전한 실패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식물에 수재가 있던 일레인이 학문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그림을 공부하는 과정, 애정 행각을 벌이고, 존을 만나고, 딸을 낳고, 결혼을 하고 급기야 온갖 회한을 품은 채 토론토를 떠나기까지, 한 똑똑하고 성공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물론 토론토를 뜬 이후의 삶도 서술을 하지만 분량도 많지 않고 더 중요하지도 않다.
  살면서 주인공과 비슷한 회한이 하나 없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다 그게 그거지. 배우 엄앵란 씨 말마따나 201호나 202호나. 하지만 작가가 애트우드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이이가 만든 등장인물은 회한이 있어도, 슬픔과 절망을 겪어도 심하게 앓는다. 그래 네 명의 초등학교 동창 가운데 끝까지 조명을 받는 두 친구, 일레인과 코딜리어로 하여금 기어이 손목까지 긋게 만든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난 이런 오버 액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그런 거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시라. 그리고 진짜로 면도칼로 팔목 그어보신 분, 천국행 직통 약물을 자셔본 분이 계시면 또 손 들어보시라. 거봐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생각만 한 번 해보는 정도이지 않은가. 왜 애트우드의 소설에서는 꼭 끝까지 가야 하는 건지.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주인공의 전남편 존이 침실을 광택 나는 검은색으로 페인트  칠을 해놓고 “내가 이사하고 나서 저 벽 색을 바꾸려고 하면 페인트칠을 열다섯 번은 해야 할 걸.”이라고 말하는데, <도둑 신부>에서 팜-파탈, 러시아 백작부인의 딸이자 폴란드 계 유대인이자, 동유럽 출신 집시의 후예이자, 전부 다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 지니아의 초대로 주인공의 한 명인 토니가 참석했던 파티가 열린 아파트의 검은 페인트와, 파티를 주최한 아파트 주인의 대사가 똑같다. 아무리 자기 책이라도 이런 건 한 번만 써먹어야지 자꾸 반복하면 어디 되겠어? 부커 상 수상자에다가 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1. 사실 이건 각주를 달기도 좀 뭐한 것이 다들 아시다시피 ‘코딜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착하고 아버지께 진심으로 효도하는 딸. 그러나 그의 속내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 왕한테 시집 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도마 위에서 큰 도끼로 목이 뎅거덩 잘리고 마는 셋째 딸의 이름입니다. 이 책의 코딜리어도 두 언니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아빠를 되게 무서워 해서 아빠만 떴다하면 요실금 현상이 생길까 말까 할 정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집에서는 말 한 마디 못하다가 밖에만 나가면 불쌍한 일레인에게 못된 짓을 하는 꼬마 악동입니다.
    이 아이의 부모에게는 딸만 셋 있는데 이 양반들이 셰익스피어의 사생팬들이라서 셋의 이름을 차례로 <겨울 이야기>의 퍼디타, <폭풍>의 미란다. 그리고 <리어 왕>의 코딜리아로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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