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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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의 앞날개를 보면 시인의 약력이 나온다.
 1967년 충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97년에 등단해 시집 네 권을 내서 이번이 적어도 다섯 번째고, 미당문학상, 이상화시인상, 현대시학작품상 등을 탔단다. 한 마디로 67년생이니 시집이 나온 2013년엔 마흔일곱 살의 잘 나가는 중견시인이었을 거다. 그새 또 6년이 흘렀고 시집 몇 권을 더 냈는지도 모른다. 소위 586세대지만 중앙일보가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만든 미당문학상을 2012년에 받은 걸로 보아 적극적 진보는 아닌 거 같다. 상금이 어마어마했겠지 뭐. 그가 비록 고려대학과 같은 학교 대학원까지 졸업을 했다 해도, 시인이 가난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이해심 넓은 독자가 양해해주겠다.
 미당문학상 상금이 무려 3천만 원. 흠. 그걸 1회 수상자로 선정된 오규원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거지? 오규원은 당시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로 있었으니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입장이었을 거다. 권혁웅과는 다른 처지였겠지. 그래 권혁웅은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의 첫 번째 시로 <호구(糊口)> 즉, ‘입에 풀칠을 한다는 뜻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감을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을 골랐다.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전문)


 제목과 별개로 언뜻 읽으면 (내가 변태라서 그런지 몰라도)사랑을 노래한 시라고도 읽힌다. 근데 제목과 엮어서 읽으면 오리무중이다. 첫 단어 ‘조바심’이 어떤 조바심일까. 제목과 어울리려면 어디선가 누구로부터 돈을 받을 건수가 생길 것 같은 조바심, 또는 너무도 배가 고픈 몸의 기다림이라고 읽을 수 있겠고, 내 주장처럼 이게 연애시라면 당신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시작하는 조바심일 터인데, 에잇, 여기까지 온 것, 호구,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상태라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게 어찌 밥 먹고 사는 일에 국한을 할까보냐. 그대를 향한 그리움과 욕망과 질투 또한 내 몸을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고픔’의 상태, 그리하여 겨우 입과 몸에 풀칠만 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흠. 역시 변탠가 보다. ‘풀칠’이라 말해놓고 보니 또 음침한 생각이 드네 그려. 어쨌거나 이렇게 연애시라고 단정해놓으니 그대에게 보내는 내 목 아래, 말 없는 목 아래의 모든 몸이 저절로 추신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 참 멋있다. 확실히 시인이 일단 한 번 시를 썼다 하면, 그건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마음대로가 돼버린다. 그게 시와 시인의 팔자지 뭐.
 시집을 읽어보면 얼마나 먹는 것에 관해 많은 시를 올려놨는지, 그래서 첫 번째 시로 <호구>를 등장시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첫 번째로 시인이 배가 고프다는 얘기를 해놓고 다음부터 숱한 음식의 장면들이 나오는데 나열을 해볼까?
 신의주찹쌀순대, 의정부부대찌개, 춘천닭갈비, 연포탕, 청국장, 조마루감자탕, 김밥(천국), 오징어, 24시 양평해장국, 우동, 상추와 삼겹살, 조개구이, 고려삼계탕, 라면, 칼국수, (담배꽁초가 든)짬뽕 까지, 온갖 먹을거리가 시집을 관통한다. 물론 시인이 거론한 모든 음식들이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고, 가학과 피학이 있고, 궁기와 포만이 있고, 먹고 사는 애달픔이 있다. 그 외에도 시의 무대는 노인들 십 원짜리 고스톱 치는 아파트 경로당, 도봉근린공원, 주부노래교실, 천변체조교실, 금영노래방, 불가마, CGV 등을 망라한다. 이렇게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소를 시의 소재로 찾은 권혁웅은 굳이 이런 ‘시설’이 아니더라도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 저 감감함 혹은 편안함 /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 무슨 맛이었을까?” 하고 한 때는 흔하게 볼 수 있었으나 요즘엔 여간해 보기 힘든 한 가장의 장면을 포착하면서 이 가장은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한 봄밤이 거느린 슬하, 즉 봄밤의 아들이 되어버린 광경을 그리기도 한다. (<봄밤> 부분)
 이렇게 대부분의 시가 조금은 우중충한 서민의 눈으로 본 세계다. 시인의 아버지는 많이 늙지 않은 나이에 한 방에 훅 가버렸고, 어머니는 무릎이 아픈데다가 오른 팔이 마비가 되어 십 원짜리 고스톱 화투장도 감칠 맛나게 찰싹 후려치지도 못하면서도 아이들한테는 오기는 뭐 하러 오니, 명절 때마다 얼굴이나 보고, 이웃들은 자식들을 키워놓고 보니 그게 범의 새끼였다는 걸 알아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의 시편들.
 대개 시집 한 권을 사 읽고 괜찮은 시, 괜찮은? 건방떨지 말고 얘기해서,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두 편 건지면 본전은 뽑는 거다. 내가 읽은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소개하고 독후감 접는다.




 할머니가 익어간다



 청국장은 고구려 전사의 음식이라고 한다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콩을 담아 안장 아래 두면 콩이 발효된다 말의 체온은 42도, 달리지 않아도 이미 숨 가쁘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노랗게 굳은 요구르트다 장판 아래로 번지는 파문이다 거기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계신다 자잘한 콩들처럼 바글거리는 어머니……들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 냄새를 할머니 냄새라 말하지 마라
 저승, 그 미지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사의 비상식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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