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박사의 집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프레스21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먼저 독후감을 쓴 <혹스무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타자의 언어를 사용하여 당대의 사건과 인물을 전용(轉用)한” 작품. 이번에 애크로이드가 호출한 사람은 생몰이 1527~1609인 당대 영국 최고 수준의 수학자, 기계공학자, 점성가 또는 천문학자, 마법학자, 연금술사, 역사학자, 생물학자, 해부학자, 신비주의 철학자라 불리던 존 디 박사. 존 디 박사는 실존했던 인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헨리 8세의 딸인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자문역을 지냈다. <혹스무어>와 마찬가지로 애크로이드는 이 책에서도 시간과 인물을 무한정으로 왜곡해, 잠깐 딴 생각했다가는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할 쉽지 않은 <디 박사의 집>을 썼다.
 작품을 쓴 시기가 1993년. 목차를 보면 하나, 둘, 셋……, 일곱. 이렇게 숫자로 된 장章은 딱 1993년이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에 즈음하는 현대의 런던이고, “장관”, “서재” 같이 표제가 붙은 장의 무대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로 읽히는 시간적 공간이다. 현대의 화자는 ‘매튜’라는 이름의 젊은이이며, 과거의 화자는 당연히 디 박사다. 그러니 현대와 과거가 서로 병치해 자신의 주장과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것 역시 <혹스무어>와 대단히 유사하다. 하긴 애크로이드의 관점이 ‘역사의 변형’인 바에야 이런 구성이 최선일 수 있으리라.
 17세기 초반, 디 박사의 말년에 그의 주된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로마 이전에 벌써 번창하고 있었으나 이젠 폐허가 된 런던과 인조인간의 탄생. 온갖 서적을 뒤지고 탐사를 거친 끝에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건설하기 이전에도 후세에 런던이라고 불리게 될 지역 근방에는 자생적 도시가 번성하고 있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인조인간, 당대 최고의 연금술사만이 가지고 있는 비법으로 일반적으로 ‘호문쿨루스’라 일컫는 것. 호문쿨루스를 만들기 위한 비법을 소개한다.
 “생명의 씨앗을 앤트워프산 유리 속에 담아 40일 동안 십자 모양을 한 자석 네 개와 함께 말똥 속에 묻어두는데, 나흘마다 신선한 이슬로 된 유리 속의 물을 갈아주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는 17세기 초에 발간한 백과사전을 뒤지면 대강 방법이 나온다. 그러나 아직도 특허 심사가 진행 중인 디 박사의 나머지 레시피를 조금 더 보자.
 “41일째가 되면 숨을 쉬며 팔다리를 움직일 것이며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테지만, 투명하고 눈이 달려 있지 않다. 이제 그것은 1년 동안 ‘인간의 혈액이라는 비약’을 흡수해야 하며, 그 동안에는 계속 유리 속에 머물러야 한다.”
 즉 유리병 속에서 1년 동안 더 머물며 사람의 피를 비약秘藥으로 섭취한 연후에야 활동이 가능하다는데, 호문쿨루스의 생명은 딱 한 세대, 30년에 한하며, 각자가 같은 방법으로 불멸의 삶을 살 수 있단다. 윽. 그러면 혹시 이들 호문쿨루스가 자기 번식을 통해 21세기에도 대를 이어 내려와 사람의 힘으로는 하기 대단히 위험한 일들, 우주탐사나 전쟁수행, 생체실험에 동원되고 있는 거 아냐?
 거세게 비가 내리던 날 밤, 디 박사 집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과거에 박사가 스승으로 모신 바 있는 페르난드 그리핀 박사를 사사한 켈리 씨로, 그리핀 박사의 운명의 침상을 지켰으며, 넓게 생각하면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는지라 얼른 켈리를 조수로 채용하게 되면서, 디 박사는 어이없게도 흑마법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게 된다. 물론 흑마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여 삼천 년 전의 런던을 발굴하려 하는 것. 켈리는 또한 테니스공만 한 유리구슬을 가지고 있어서, 전력을 다 해 구슬 속을 보고 있으면 몇 가지 형상과 말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이것을 디 박사는 삼천 년 전 시대 사람과의 대화로 생각하고 있지만, 시간의 격차 때문일까, 도대체 의미 있는 의사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켈리 씨가 유리구슬 속에서 분명하게 보고 들은 남자 둘이 있으니 그들은 서로를 메튜와 다니엘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20세기 말에 디 박사의 집이었던 저택을 상속받은 메튜가 친구이자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다니엘을 초청해 집 구경을 하는 모습. 이게 애크로이드의 전형적 문법이다. 시간과 사건이 서로 변형되고 전이시켜 독자의 뇌를 뒤섞어 버리는 일. 역사는 언제나 왜곡될 수밖에 없고 창작 또한 언젠가 있었던 것을 적당히 섞어서 표절하는 행위에 불과하며, 심지어 역사란 것 자체가 바로 지금 이루어지는 것 말고는 없다는 과격한 주장.
 지금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후감을 쓰면서 현대 시점의 등장인물인 메튜와 그의 부모, 어머니의 애인, 다니엘 등에 관해서는 피하고 있다. 물론 작품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인심 써서 힌트인지 미낀지 딱 하나만 얘기해드리지. 메튜가 지금 나이 스물아홉. 얘가 혹시 호문쿨루스 아냐? 1년 안에 죽든지 자기 복제를 해야 하는?
 책을 읽는 내내, 숱한 소도구로 등장하는 것이 ‘먼지’. 먼지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궁리했다. 심지어 <혹스무어>에서도 먼지를 묘사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먼지는 바람 부는 곳에서는 날리기만 하지 쌓이지 않는다.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면 표면 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끝없이. 몇 천 년이 흐르면 폼페이처럼 한 도시를 지하에 매몰시키기도 하고, 수백 년간 쌓여 3층의 집을 2층으로 만들기도 한다. 즉 시간의 퇴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퇴적을 자주 ‘역사’라고 부른다. 우연히 깊은 먼지 속에 살게 된 한 인격은 그의 삶 자체가 한 자리, 집이 있었던 장소의 역사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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