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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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이 책이 2013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놀랐다. 근데 조금 덜 놀랐다. 2016년 공쿠르 상을 받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를 통해 벌써 크게 한 번 놀랐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을 받은 순서로 보면 <오르부아르>로 먼저 놀랐어야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은 순서로는 그랬다.
 난 공쿠르 상을 받은 작품은 좀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글쎄 그동안 읽었던 수상작 가운데 유독 나하고 맞지 않는 작품들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더러 공쿠르 상의 특징을 말해보라면, ① 보통의 독자들은 해독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해, 전문적이고 고급한 문학수업을 수료한 자들만이 서로 공감하기 위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에 한정하고, ② 전문가들로 하여금 딱 하루 동안 책을 읽고, 해석하고, 논평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넘어서는 작품은 수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③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척하면서도 상금은 가장 쪼잔하게 주는 문학상이었다. 딱 1년 전에 <달콤한 노래>를 읽음으로 해서 이런 선입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오르부아르>로 드디어 선입관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오르부아르>를 몇 마디로 정의하자면, 쉽게 이해되고, 재미있으며, 불길한 숫자라고 칭하는 666쪽에 달할 만큼 공쿠르 상 수상작치고 길기까지 하다. 책은 출판사 열린책들의 특징인 작은 판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쪽 당 25행을 배열해 글씨가 촘촘하게 박혀있어 분량은 만만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틀이면 책 다 읽고 나처럼 독후감도 쓴다. 당연히 밤마다 쐬주 한 병씩 이틀 밤에 두 병을 마셔대면서도. 어떻게 이틀 밤이냐고? 월요일 오후에 책 읽기 시작하면, 월요일 밤에 제철 방어회 곁들여 일품 진로 한 병, 화요일 밤에 두부 안주해서 미르25 한 병, 수요일 오전 일찌감치 책 읽기 마치고 독후감까지 쓰면 이틀 맞잖아.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한여름에 시작해 1918년 빼빼로 날, 11월 11일에 끝나는데, 소설을 시작하는 1918년 11월 2일에는 프랑스 군도 그렇고 독일 군도 그렇고 휴전 내지 종전에 관한 협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는데, 프랑스와 독일은 이미 기존의 국경이 있었던 바라, 한국전쟁처럼 종전 시점의 전선에서 새로이 경계를 정한다는 전제 때문에 휴전 직전에 작렬했던 고지 전투는 아군이나 적군이나, 장군이나 이등병이나, 나나 너나 생각지도 못했던 터, 병사들은 그저 참호 안에 엎어져 연인이나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담배내기 카드놀이를 하고, 둘러앉아 웃통을 벗고 이를 잡고, 우리의 주인공 에두아르 페리쿠르처럼 병사들의 모습을 수첩에 크로키에 담는 등 편하게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가보다. 여기에 등장하는 악마적 미남 인간 하나가 있었으니 끝날 때까지 단 한 구석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하는 불쌍한 악당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 거덜이 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장교로 참전하여 적어도 대위 타이틀을 따고 제대를 해서 좋은 직장을 거쳐 왕창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문의 성chateau을 원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보수하는 일을 자기 인생의 일차 목표로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근데 별 공훈도 없이 전쟁이 끝나려 하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는 일. 까짓 병사들의 목숨이야 내 알 바 아니니까 얼른 국지적인 전투라도 하나 터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터, 기어이 일을 벌여, 늙은 병사 하나와 젊은 병사 하나, 이렇게 두 명을 한 조로 평화롭게 보이는 112 고지 위의 적진을 수색하라고 지시한다. 명령을 받은 두 병사는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철조망을 걷어내며 기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발의 총성이 빵, 빵, 빵, 하고 들리더니 늙은이 하나와 젊은이 하나가 시간차 거의 없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리고, 지금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하는데 자기편 병사를 쏘아죽인 ‘독일놈들’에게 분노가 솟구친 정의의 프랑스 군인들 모두는 수류탄을 주머니에 넣고 소총을 집어든 채 112 고지를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돌진해나가 기어이 고지를 탈환하고 만다.
 이렇게 젊고 야망에 차고 잘 생긴 젊은 장교 한 명의 수작질 때문에 666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 한 편 탄생해 세계적 명성을 즐기고 있는 공쿠르 상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어수룩하고 도무지 자기주장을 내세울 줄 모르는 한 선량한 전직 회계원 출신의 병사 알베르도 줄레줄레 돌격하는 병사들의 뒤를 좇아 뛰다가, 하필이면 재수 없이 수색 나갔다 오라는 명령을 받고 총알받이가 된 전우의 시체 옆을 지나다 그들의 상처를 발견하는데, 에그머니, 이들의 총상이 등에서 가슴 쪽으로 뚫린 거였다. 즉 독일군의 총알에 죽은 게 아니고 프랑스군이 쏜 총알에 맞아 허무하게 죽었다는 뜻. 알베르가 놀라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건장한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는 그대로 돌진해 알베르를 약 2미터 깊이의 미끈미끈한 진흙구덩이로 빠뜨려 버린다. 이후 하필이면 독일군 폭탄이 터져 흙더미가 알베르의 몸 위로 40센티미터 가량 덮여 그는 서서히 죽음을 맞게 되고. 이와 거의 동시에 우리의 주인공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불쌍한 알베르가 빠진  진흙 구덩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유탄, 그러니까 조준사격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던 총탄에 오른쪽 다리를 맞아 철퍼덕 쓰러져버린다. 그러나 주인공다운 휴머니즘에 입각해 자신도 다리가 아파 넋이 나갈 정도이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 기어가 거의 죽어가는 알베르를 흙더미 속에서 꺼내주고 이미 숨을 멈춘 그의 몸 위로 함께 쓰러지면서 건장한 에두아르의 몸무게와 중력의 작용으로 알베르의 갈비뼈 몇 대가 부러지며 심장을 꾹 눌러주는,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심폐소생술을 한 꼴로, 놀랍게도 이미 죽은 알베르는 갑자기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죽은 자들 가운데 삼분 만에 다시 살아나고야 만다. 바로 이 순간, 또 한 방의 포탄이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지며 큼지막한 파편이 팽글팽글 팽글로스 선생이 왈츠를 추듯 회전하며 맹렬한 속도로 날아와 프랑스 최고의 벼락부자 집안에서 언제나 최고급으로 살던 반항아이면서 예술적 기질이 뛰어나며 놀라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우리의 주인공 에두아르 페리쿠르의 턱 부분을 강타해, 아래 턱 모두와 혀 전체를 육신에서 성공적으로 제거해버린다.
 작품의 줄거리는 여기까지. 정확하게 전체 스토리의 2 퍼센트를 소개했다. 나머지 98 퍼센트는 직접 읽고 그 재미에 빠져보시라고.
 100년 전에 있었던 비극적인 전쟁과 후유증에 관해 쓰고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건너뛰자. 이 소설에 관해 거창하게 반전문학이니 시대 비평적이니 하는 단어를 쓰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다 읽고 내가 느낀 감상은 ‘정말 잘 쓴 대중문학’이라는 것. 당연히 잘 생긴 악당, 그것도 태생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절대 악당인 앙리 도네프라델이 등장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극한 부자에 최고 권력자까지 이르는 줄을 가지고 있거나, 일신상의 영달, 아니면 적어도 보신을 위해 복지부동하는 공직자들이며, 유일하게 정의로운 인물 조제프 메를랭은 늙고 냄새나고 더럽고 우울하고 늘 틀니가 덜거덕거리며 다른 이들에게 불쾌감만 주는 퇴물 하급, 하급 중의 하급 공무원이다.
 역자 임호경은 그가 번역한 작품들이 하도 잘 팔려 ‘개이득’을 봤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는데, 그에게 ‘개이득’을 주는, 즉 겁나게 많이 팔리는 책답게 리얼한 묘사와 긴급한 상황설명, 최고와 최하 계급의 극적 보색대비 등을 기막히게 배열해놓았다. 길지만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도 이게 보통 솜씨 갖고 되는 일이 아닐 터. 나는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소문이 난 책들은 웬만큼 시간을 흘려보내 소문이 거의 꺼질 때쯤 읽는 습관이 있는데, <오르부아르>는 말 그대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를 만한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공쿠르 상을 받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고 해서 물론 명작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하나 확실한 건, 겁나게 재미있는 책이고, 세상의 모든 소설 가운데 재미만큼 독자에게 매력적인 포인트는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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