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한계 시간 민음사 모던 클래식 68
율리 체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율리 체의 전작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을 읽고 이거 참 난감한 작가가 또 한 명 등장했다 싶었다. 이번에 <잠수 한계 시간>을 고를 때는 거의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선뜻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는데 그건 우습게도 <형사 실프……>를 읽으며 난감했던 기억을 그동안의 시간이 풍화시켰기 때문이었다. 1974년 본에서 태어난 범띠 체 여사님께선 일찍이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소설도 쓰기 시작했으며 UN에 근무하며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기도 하고, 법학박사답게 법조인으로도 활약하면서, 놀랍게도 주어진 시간에 비하면 무시무시한 양의 소설, 아동문학, 에세이, 평론집들을 출간해내는 바쁜 일생을 지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팔자도 참. 뭐 하러 그리 바쁘게 살아. 그저 먹고 살 만하면 좀 편하게 지내지. <잠수 한계 시간>의 주인공 스벤 피들러처럼 저 멀리 지구의 가장 끝에 위치한 카나리아 제도 한 구석에다 보기 좋은 집을 한 채 지어놓고 유유자적 여유 있는 중년, 노년을 지내는 것도 째지게 멋있지 않나? 하긴 주인공 피들러는 성姓, 가문으로 봐도 깽깽이나 켜며fiddler 한 평생 지내기 딱 좋은 집안이기도 하다. 내가 독일의 대학 입학 절차와 징병제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스벤 피들러는 입학자격 시험에 높은 점수로 합격하고 곧바로 진학을 하는 대신 일단 공병대 잠수병으로 입대를 하고, 군 복무를 1년 더 연장을 한 연후에 비로소 대학에 진학해 5년 동안 법학을 공부하고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필기시험까지 마쳤다. 이어 구술시험을 보는데 두 명의 수험생이 네 명의 시험관에게 면접을 당하는 모양이고, 구술시험까지를 마치면 곧바로 해당지역 사법 관련 공무원이 되는 것같이 설명한 걸로 봐서 로스쿨 비슷한 것 같다. 작가 율리 체는 구술시험까지 당당하게 합격해 사법부 법조인으로도 활약하지만, 공부 잘 한 우리의 주인공 스벤 피들러에게는 심술궂은 면접관 브룬스베르크 박사가 무엇을 물어보는가 하면, “피들러 씨, 당신은 아는 게 많으니까 몽테스키외라는 이름도 분명히 알 겁니다. 그렇다면 그 철자를 말해보세요.” 삼권분립 정신으로 미국의 건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철학자인 줄은 잘 알지만 그의 이름자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필요는 없었을 터. 버벅거리는 스벤에게, 교수는 다음 질문을 한다. “좋아요 피들러 씨, 그렇다면 국법학의 성스러운 아버지의 성姓 말고 이름을 빨리 말해보세요.” 난 국법학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 스벤은 법학을 전공했으니까 ‘볼테르’인 건 아는데,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볼테르의 이름을 아시는 분 몇 명이나 될까? 스벤도 몰랐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프리드리히”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대답을 하고 나니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각성, 그건 볼테르의 이름이 아니라 질문을 한 브룬스베르크 교수의 이름이었다. 두 가지 질문을 완벽하게 말아먹은 스벤은 당연히 탈락할 줄 알고 있었으나 의외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한다. “당신은 좋은 법률가입니다, 피들러 씨.”라는 격려와 함께. 자신의 앞날과 성공을 위해 마치 전쟁터 같은 시험을 치룬 후 스벤은 다시는 독일과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하고, 그리하여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 어린 열여섯 살의 소녀 ‘안톄’와 함께 아프리카 북서쪽 카나리아 제도의 북섬에 자리를 잡고 독일, 미국 관광객들에게 잠수교습을 하며 보낸 세월이 14년, 이제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둔 시점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그 해 11월, 아주 부유한 독일인 커플이 스벤에게 잠수를 배우기 위해 섬에 도착하니, 남자는 휴양지에 어울리지 않는 노타이에 맞춤 양복 차림의 마흔두 살의 테오도르 하스트 씨, 여자는 독일 여배우이며 드라마 “위아래”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친 욜란테 아우구스타 조피 폰 데어 팔렌. 욜라는 아직 젊음과 탄력 넘치는 체격과 미모를 겸비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알게 되지만 미리 알아도 손해될 이유가 없어 소개를 하니 다리 사이를 깨끗하게 면도하고 다니는 것이 습관인 여자이고, 테오는 유명 단편소설을 몇 편 발표한 후 말로만 대작을 쓰는 중 또는 구상하고 있는 중임을 주장하면서 사실은 욜라의 예금통장에 고인 현금 빼먹는 재미에 취미를 붙인 거 같은 인물로, 욜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그녀의 돈과, 욜라가 아닌 다른 모든 여성 앞에선 심각한 발기부전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렇게 보인다. 욜라의 성姓 ‘폰 데어 팔렌’에서 볼 수 있듯이 출신부터가 쇠똥을 뒤집어쓴 채 엄마 배속에서 나올 때부터 말 그대로 주둥이에 은수저를 물고 있던 터라 한때 히틀러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한 번도 키 작은 미치광이를 태워본 적 없는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런 요트를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자란 덕택에 고급 요트에 대한 지식과 작은 배의 운전에 관한 모든 것에 박식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부자 아버지는 꼭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몸을 지니고 마냥 놀 수만은 없어서 이제 영화제작계의 큰 손으로 활약을 하고 있단다. 하여간 욜라의 배에 관한 지식은 책 후반부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게 된다.
 소설은 비싼 비용을 지불할 고객 두 명이 섬에 나타나 앞으로 두 주일을 보내면서 사달이 나는 이야기다. 일단 짐작은 하시겠지? 젊은 미녀와 그녀의 나이든 연인. 그들 사이에 나타난 건장하고 진중한 남자. 언뜻 보면 테오는 욜라에게 거의 상습적으로 폭력을 구사해 언젠가는 자기가 테오에게 맞아 죽는 건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욜라에게 스며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런 상태에서 욜라는 잠수 선생인 스벤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를 유혹하기로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 테오가 보는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스쿠버 강사와 키스를 나누는데 테오 역시 그것에 심각한 반응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한 커플. 이 정도 읽고, 나는 율리 체가 쓴 전작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간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적어도 관념적 표현으로 ‘평행 우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90 퍼센트 이상이 주인공 스벤의 일인칭 관점에 의거해 쓰였고, 10% 미만이 욜라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서는 두 명의 기록자가 거의 비슷한 사실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만 내용이 진전됨에 따라 극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변하고 만다. 즉 한 사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던 폭행사건을 관찰하는데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는 걸 보면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미궁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 상해를 당하고, 스벤과 욜라 둘 중의 하나는 완전한 거짓말쟁이란 사실.
 누가 거짓을 기록했을까? 나도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서도. 작가가 애초에 이런 결말을 정해놓고 쓴 것 같은 평행 우주의 혼돈. 읽어보시라. 내가 여태 쓴 것보다 79배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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