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 흰 장미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3
장애령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아이링(張愛玲)이 1944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소설을 티엔친신(田沁鑫)과 저우허양(周鶴洋)이 각색해 연극을 위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장아이링의 원작은 창비에서 출간한 중·단편집 《경성지련傾城之戀》에 실려 있으나 읽어보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다. 장아이링은 청 제국의 귀족 집안에서 장군 이홍장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49년 중국혁명이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해 1995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외로운 머리를 뉜 작가로,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골분을 태평양에 뿌렸다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모국에 머물지 않고 체제를 달리하는 자본주의의 표징인 미국으로 망명한 이유로 친일 작가라는 빨간 줄이 갔다고 하는데, 망명하기를 잘했지,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머물렀다면 1960년대에 사람 잡던 문화혁명에 걸려 돌 맞아 죽던지, 조리돌림 끝에 울화병이 돋아 벽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숨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장아이링의 작품과 경향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채, 원작을 극도로 왜곡시킨 희곡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연출이 무한정으로 변형 가능한 현대희곡이라 더욱 그러했다.
 책 뒤에 달린 해설을 보면 원작 <붉은 장미 흰 장미>의 내용이 대략적으로 나온다. 먼저 희곡을 읽고 원작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면, 단박에 뒤집어진다. 크게 보아 두 쌍의 부부가 출연한다. 근데 원작이 희곡으로 변이하면서, 주인공의 성gender가 바뀐다. 즉 아내가 남편이 되고, 남편이 아내가 된다. 더구나 남편으로 바뀐 원작의 아내 멍옌리(극중 남편)는 아내 퉁전바오가 지역 대표로 있는 투자사의 일개 영업사원이며 인터넷 게임 X크래프트에 거의 중독 상태로 빠져 지낸다. 그러니 남녀 주인공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도 완전한 현대로 옮겨왔다. 구태여 장아이링의 원작을 강조한 것은 부부 두 쌍의 불륜의 구조와 원작에 장아이링이 써 놓은 문장들을 사용하기 위함일 뿐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것 같다.
 공연의 형식도, 나는 연극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저 짐작에 그치는 수준이지만, 한 번에 많은 등장인물이 무대에 올라, 즉흥적이거나 사전에 계획한 움직임과 더불어 계속해서, 쉬지 않고 각자의 대사를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등장인물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대사를 하기 위해 무대 한 구석에 앉아 고뇌에 싸인 표정을 지을 필요 없이 자기 순서가 되면 적절한 몸짓과 표정을 취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다만 몸짓이란 것이, 한 무대에 많은 등장인물이 있는 관계로 동선이 서로 엇갈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의 움직임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는 다수가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일종의 스탠딩 코미디로 만들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전적으로 연출자 마음대로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연극적 표현방식은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하고 비슷하기도 한 것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여간 그렇다.
 주인공은 퉁전바오-멍옌리 커플의 아내 퉁전바오. 사람에겐 누구나 이쪽과 저쪽의 성격이 존재하는 법. 이건 좌뇌와 우뇌가 합쳐서 뇌 하나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리라. 퉁전바오는 투자회사 로이터로이스의 화북지역 대표인데 한심한 남편 멍옌리를 사실상 부양 비슷하게 하며 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가, 날이 갈수록 ‘성격차이’ 또는 ‘능력차이’, ‘관심사 차이’ 등의 이유로 불만족스러운 단계로 접어든다. 퉁전바오의 한 달 출장 동안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한 철없는 남편 멍옌리는 불륜으로 접어들지는 않지만(애초에 그럴 의도도 없었고) 인터넷 게임을 위해 젊은 여자를 한 명 집에 들이는 것을 보고 잔뜩 열을 받아 별거를 선언하고는 ‘홧김에 서방질’을 시도하려다 좌뇌와 우뇌, 혹은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을 시작하는데, 이때 또 다른 나의 역할을 하기 위해 ‘전바오을(乙)’ 역할을 하는 배우를 한 명 등장시킨다. 홧김에 서방질의 대상은 미국유학 중에 친해져 회사에 같이 투자한 ‘왕제루이’로 어려서부터 친구인 왕스홍의 남편이다.
 얘기한대로 1940년대 단편소설을 2010년대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해 젠더와 시대적 환경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희곡은 단막극을 위한 작품이지만, 티엔친신은 한 무대에, 내 수준으로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많은 등장인물이 여러 장면, 아니 가지가지 대사를 동시에 쏟아냄으로서 읽으면서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내가 현대 연극에 아는 것이 없고 경험도 부족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면으로 보면 이런 드라마를 읽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라 할 것이다. 전에 <워 아이 xxx>처럼 슈프레히코어 희곡을 읽을 때 느꼈던 충격보다는 덜하다. 비슷한 희곡을 한 편 더 읽을 기회가 생기면 훨씬 더 친숙해질 것 같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