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의 기억 ㅣ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2
루쥔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평점 :
루쥔(陸軍)이 지었고, 왕레이(王磊)가 정리를 했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현대 희곡, 현대 연극에 무지한 내 수준으로 감을 잡자면, 베이스가 되는 희곡은 루쥔이 썼고, 이 작품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 지에 관한 큰 줄기는 연출가 왕레이가 틀을 잡았다, 정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밝혔듯이 현대 연극에 관해 완전히 깜깜한 아마추어의 의견이니 어디 가셔서 인용하지 마시라. 개망신당하기 십상이리라. 예를 들어 작품 속에 가장 강렬하게 읽힌 장면, 흑마(黑馬) 검둥이가 난산 끝에 새끼를 낳고 말들을 돌보느라 나가떨어진 치우즈와 뤄샤오산이 격정적으로 러브씬을 벌이는데, 역자 오수경도 책 뒤편의 해설에서 명장면으로 소개하기도 한 바, 이것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 하는 연출의 규범을 만든 건 아닌가 싶다는 의미다.
등장인물을 단 세 명. 치우즈는 서른아홉 살 먹은 여자로 농장 주인의 아내다. 농장 주인이자 치우즈의 남편이 누군가 하면 장얼마오라는 인간인데, 이이는 몇 년 전 시골 농장에서는 아무리 성공을 해도 이름을 날리며 멋있게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돈을 벌기 위해 광저우로 떠나 이제 그의 호언대로 왕창 번 인물. 당시 중국에서 그리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단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장얼마오가, 물론 그가 주장하는 걸 그대로 믿는다면, 어떤 젊고 잘 생긴 여자가 자신의 불법행위를 거의 완전히 알고 있어서,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사법당국에 그를 고발해 콩밥을 먹이겠다고 나섰다는 거다. 독자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광저우에서 새로 젊은 애인이 생겨 벌써 서른아홉 살이 된 아내 치우즈와 이혼을 하고 아가씨하고 재혼을 하고 싶어 머리를 짜낸 꼼수 같은데 끝까지 사실관계는 밝히지 않는다.
남은 한 명의 이름은 뤄샤오산. 당년 스물세 살. 광저우 대학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합격증을 받았으나 입학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제적을 당할 위기에 처한 인물. 이만 위안만 손에 들게 되면 당장이라도 수속을 밟아 입학할 각오를 다지던 중 장얼마오의 눈에 띈다. 장얼마오가 아내 치우즈에게 농장과 농장에 딸린 가축 전부, 거기다가 이십만 위안까지 엎어서 주는 대신 이혼 좀 해달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눈 하나 껌벅이지 않으니, 싸가지 없는 장얼마오가 뤄샤오산을 고용해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들이닥칠 입추 날 밤까지 오랜 시간 독수공방한 치우즈를 꼬드겨 함께 잠자리를 하는 대신 입학금 이만 위안을 받는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린 인종이다.
근데, 원래 틀을 잡아놓고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건 희곡도, 연극도, 하다못해 흔한 우리네 인생도 아니다. 어딘가 적어도 한 군데에서 펑크가 나야 희곡이고, 연극이고, 인생이다.
뤄샤오산. <여름의 기억>이 초연된 것이 1999년 쯤. 당시 중국에서도 수재들이나 입학 가능했던 광저우 대학에 합격한 이 청년은 자신이 고용된 사유가 매우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말과 가까이 지낸 전력에다가 성실한 생활습관 덕에 농장에서 아주 훌륭한 생활을 해나가 치우즈의 애정을 듬뿍 받는다. 근데 여기서 얘기하는 애정이라 함은 열여섯 살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라, 자식 없는 여자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자간의 애정과 더욱 흡사한 관계가 형성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좋은 관계가 저 위에서 말한 검정말 검둥이의 힘겨운 출산을 함께 겪으면서 육체관계로 엮이게 되고 이후 뤄샤오산은 치우즈를 여자로 사랑하게 된다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겠지? 아니면 적어도, 그럴 수 있겠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조금도 걱정 마시라. 그건 극작가가 다 알아서 정리해주는 거니까.
치우즈가 뤄샤오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무대 저 한 편에 조명을 받고 장얼마오가 서 있어서 뤄샤오산과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 이런 장면이 좀 많이 나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대단히 매력적이다. 실제로 먼 길을 나서 극장에 가 한 번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