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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내가 읽은 책은 2003년 출판사 ‘맑은소리’에서 안의정이란 사람이 번역한 책으로 현재는 절판이고 책을 찍은 출판사도 짧은 숨을 멈춘 거 같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반값으로 파는 거의 새 책 수준의 헌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굳이 이 작품을 읽고 싶으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21번으로 간행한 <체스 이야기 · 낯선 여인의 편지>나 고려대 출판부의 청소년문학 시리즈 23번 <모르는 여인의 편지>를 읽는 편이 좋겠다. 두 책은 적어도 직역이다. 뭐, 당신이 스무 살이 넘었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은데, 청소년문학 작품에도 좋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선택은 스스로 하시라.
사흘 동안 산악지대를 여행하고 이른 아침에 비엔나로 돌아온 저명한 작가 R씨는, 문득 오늘이 자신의 마흔한 번째 생일임을 알아낸다. 좀 쓸쓸하기는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자유스러운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R씨에게 집사는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도착한 온갖 우편물을 내놓고, 이 가운데 두툼한 편지를 한 통 발견하는데, 발신 주소와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어제 제 아이가 죽었습니다.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저는 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위해 죽음과 싸웠습니다. 독감이 아이의 가련한 육체를 신열로 달구었던 40여 시간 동안 저는 줄곧 침대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그 아이의 이마를 식혀주며 불안에 떠는 작은 손을 낮이나 밤이나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저도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제 눈이 저도 모르게 감겨버렸던 것입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은 채 세 시간인지 네 시간인지 모르게 깜빡 눈을 붙인 사이 죽음이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본문 10 페이지부터 시작하여 132 페이지까지 이어지는데, 그 안에 인상적이지 않은 무수한 삽화가 곁들여져 넉넉잡고 세 시간이면 한 권 뚝딱 해치운다. 한 페이지가 놀랍게도 열일곱 줄밖에 되지 않는 것도 본문을 133 페이지까지 늘리는 신공을 가능하게 해주었을 터.
R이 이사 와서 십 수 년을 살고 있는 아파트 앞집에 살았지만, 젊어서부터 잘 나가던 자유주의자, 귀찮은 거 절대로 싫어하고 관심도 없는 R의 눈에는 띄지도 않던 가난한 가족 가운데 꼬마 소녀가 하나 살았다고 한다. 이 소녀가 가정형편으로 인스부르크에 옮겨 살다가 아가씨가 되어 다시 비엔나로 돌아와, 어려서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R의 아파트 창문을 바라다보며 지낸 세월, 그러다 아이를 낳고, 이제 아이가 독감으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자신마저 열병으로 숨을 놓을 순간 평생 자신이 사랑하던 작가 선생 R에게 자기의 온 생애를 고백하며 숨을 거두는 이야기다.
츠바이크의 문장들이 섬세하게 감정을 자극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이 다다. 아니면 내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작품을 보고도 이제는 더 이상 감동할 줄 모르는 건조한 가슴을 가졌는지도 모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