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알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26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최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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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많고 많은 아서왕 이야기 가운데 이 책을 콕 집어 선택한 이유는, <그라알 이야기>가 제목만 봐도 그랄, 그레일 즉 인디아나 존스 선생이 죽을 고생을 해가며 찾아 헤매던 성배 또는 그 비슷한 성물을 뜻하는 것이고, 주인공 페르스발은 영어로 퍼시벌, 독일어로 파르지팔,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대본을 쓸 때 이 책에서 한 포인트를 건져 창작했을 거란 짐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그너는 스스로가 문학적 소양이 상당히 깊었던 인물로 비단 <그라알 이야기> 뿐만 아니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니벨룽겐의 반지> 기타 등등도 기존에 있던 신화, 옛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색해 대본작업을 한 인물이라 그이의 작품과 동일한 내용은 처음부터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페르스발과 아서왕의 조카 고뱅 경의 행적을 보면 바그너와 트웨인(아서왕 궁전과 코네티컷 양키)의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아참. 책이 아서 왕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아서 왕의 전설, 엑스칼리버의 발견, 란슬롯, 귀네비어, 아서 왕의 시신을 싣고 가는 뗏목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아예 란슬롯과 귀네비어는 등장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귀네비어가 아서 왕의 재혼 신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아마? 굳이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란슬롯-귀네비어의 불륜에 이은 내전 중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절멸 같은 게 아니라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상당히 가깝다. 외곬수, 사실은 외곬수라기보다 유로지비에 가까운 페르스발이 어느 날 지나가는 기사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자신도 기사가 되기 위해 과부 엄마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서 왕을 찾아가 나도 기사 할래, 졸랐더니 옆에 있던 왕의 집사 ‘쾨’가 순전 농담으로 왕궁에 오다가 네가 만난 불손한 기사를 죽이고 그의 무기와 갑옷을 취해 대신 네가 기사를 해라, 했던 걸 그대로 믿어 냅다 왕궁을 벗어나 붉은 갑옷의 불손한 기사를 불러 세워 냅다 창을 던져 죽이고 자신이 기사가 된다. 이후 웨일스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성질 더러운 기사들과 대결에 굴복을 시키고 아서 왕에게 보내 항복하라고 하는, 라만차의 좀 덜 떨어진 늙은 영감이라면 감동해서 읽을 만한 내용이다.
 책 후반으로 가면 페르스발은 기사 오를란도와 견줄 만한 치매 증상이 도져 자신이 누구인지,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청맹과니 상태로 접어드는데, 이게 다 어부왕漁夫王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의 성에 초대받아 끝부분에 맑은 피가 흐르는 창(성창聖槍으로 읽히는), 그라알(편의상 성배聖杯라고 생각하자)을 보고도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암포르타스 왕과 비유할 수 있는)어부왕에게 묻지 않은 업보라는 설명이다. 이것 말고도 쿤드리와 비교할 수 있는 여인도 등장해 페르스발이 겪는 모든 곤경의 근본은 페르스발의 어머니가 졸도해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집을 떠나 결국 어머니를 죽게 만든 죄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래 청맹과니로 떨어진 다음엔,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과 코네티컷 양키>에서 많이 등장하는 성창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기사들 가운데 한 명인 고뱅 경의 영웅적 행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21세기 도시인에게 기사들의 모험담과 여성 숭배에 관해 더 이상 흥미를 못 느낀다는 점. 이 책이 나온 시점이 1181년. 840년 전에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도 이 점을 알았는지, 독자가 이제 심하게 하품을 하면서 다음 내용이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을 즈음해서, 작품을 중도에서 뚝 마쳐버린다. 물론 유실됐겠지만, 독자는 다행으로 여기며 한숨을 한 번 쉬었는데, 그게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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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19-10-0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이야기는 역시 재미있네요^^;

Falstaff 2019-10-02 12:37   좋아요 1 | URL
재미있다는 데 백퍼 동감합니다. ^^
근데 문제는, 하도 오래전에 쓴 책이라 기사가 하는 일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다는데 있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 책 뒤편으로 가면 좀 지루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