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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업 비치’라는 자그마한 해변 휴양도시의 모나크가街, 어느 추운 날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에 신문지를 찢은 구인광고를 든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등장해 늙은 샌들러 기본즈에게 모나크가 1번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부츠를 신고 짤막한 가죽 상의만 걸친 모습을 본 샌들러 노인의 머릿속에 아가씨의 반질반질한 무릎과 허벅지가 그리 오래 자리 잡고 있게 될 지는 두 명 다 몰랐다. 아가씨의 이름은 주니어. 신문 쪼가리의 구인광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우미, 성숙한 전문직 여성의 비서 구함. 강도는 약하지만 극비 업무. H. 코지 부인에게 지원할 것. 실크, 모나크가 1번지.”
그리하여 주니어,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양이 히드 코지 부인의 말벗이 되기에 이른다. ‘히드 투 나이트’가 본명. 그럼 어떤 운명의 여인인지 대충 짐작은 하시겠지? ‘밤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사실 그리 복잡한 사생활을 가진 여인은 아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이런 ‘이야기 취향의 이름’을 가진 아이는 주로 흑인 하층계급 출신이었다고 미국인들은 즉각 반응을 한단다.
히드 부인이 열한 살일 때 지금은 쇠락해 문을 닫은 코지 리조트 근처에 살며 호텔 주인 코지 씨의 열두 살짜리 손녀딸 크리스틴과 어울려 유년의 시간을 지내고는 했었나보다. 크리스틴의 엄마 메이는 천민 출신(으로 보이는) 히드와 자기 딸이 어울리는 걸 보는 일이 절대로 마땅하지 않아 될 수 있으면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앞 바닷가에 뒤집혀 있는 보트 ‘실레스티얼’에서 놀려 했는데 호텔 안에 공깃돌을 두고 온 걸 늦게 알게 됐다. 그래 히드가 냅다 호텔로 달려가 공깃돌을 찾다가 긴 복도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거한의 빌 코지 사장의 눈에 들어갔다. 빌 코지가 히드 앞에 서서 커다란 손으로 얼굴과 아이의 턱과 아직 전혀 부풀지 않은 젖꼭지 주변의 납작한 가슴을 슬쩍 쓰다듬으며 쾌활하게 웃었는데 바로 그 순간 히드는 아직 뭔지는 모르지만 사장님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스친 사실이 조금은 전율스러우면서도 간질거리기도 하고 좀 아픈 것도 같은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 크리스틴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함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그러나 바로 직전, 공깃돌을 찾으러 가는 히드를 뒤쫓아 호텔의 한 창문을 넘겨보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코지 사장이 허리춤을 풀고 여자 종업원으로부터 유사 성행위 서비스를 받는 장면을 목격해버렸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광경을 역시 히드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걸 직감처럼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건 둘의 우정이 언젠가는 금이 갈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당시 홀아비 신세였던 코지 리조트의 사장 빌 코지 씨는 무수한 여인들과의 연애에도 불구하고 불과 열한 살의 아이,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히드에게 청혼을 하고, 기어이 결혼해버린다. 당시 미국 흑인사회에서 조혼이 일반적인 일이었다지만 불과 열한 살짜리 아이와 결혼하는 쉰한 살 노인은 당시에도 다분히 유아성도착증세로 의심받은 수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업 비치 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해 백인 톱클래스들과도 교분이 깊었던 코지 씨는 결혼 후에도 히드가 초경을 할 때까지 함께 침상에 들지 않았으며, 초경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신혼여행에 올랐다고 하니 변태성욕이라고까지는 하지 못할 수준이었겠다.
그런데 이 일로 난리가 난 사람이 있었으니 빌 코지 씨의 아들 빌리보이의 아내이자 코지 씨의 과부 며느리인 메이 여사로, 코지 호텔과 저택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자기 딸 크리스틴이 상속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졸지에 크리스틴 대신 히드가 상속인으로 정해졌기 때문. 이런 상태로 4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다. 그 동안 당연히 빌 코지씨와 메이,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세상을 등졌으며, 호텔도 문을 닫아 빈 건물이 세월의 풍화작용 앞에 나날이 쇠락해가는 가운데, 코지 저택엔 예전의 소꿉동무이자 할머니-손녀 사이인 히드와 크리스틴이 서로 반목하는 중에도 묵인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이름은 주니어인데 준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부츠 신은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등장해 코지 저택에 입주하면서 온갖 사건과 과거의 기억이 다자간의 시선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내가 읽은 모리슨으로 <빌러비드>와 <재즈>가 있다. 두 작품 다 흑인의 정체성을 밑에 깔고 노예상태에서 탈출해 정착하는 과정을 그리거나(빌러비드),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혼혈아가 자신이 흑인이 아닌 백인이라 생각하여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다는(재즈) 내용이어서 <러브> 역시 흑백 문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것도, 당연히) 생각했지만, 아니다. 미국 내의 흑인이 쓴 문학 역시 인종문제가 아닌 ‘인간문제’인 사랑, 그것도 독하고 질긴 사랑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모리슨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떤, 누구의 사랑인지는 일러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 되어야 알 수 있어, 완벽한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