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건 딱 하나, ‘열린책들’ 창사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로 무려 912쪽에 달하는 책을 정가 만 원, 10% 할인가격 9천원, 이것도 아니고 6천5백 원짜리 새 책 같은 중고 책으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부를 읽어나가다가 어어, 이거 분명히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하고 내용이 비슷한 거다. 물론 해가지지 않는 땅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에서 남의 집 귀한 개새끼들을 몰래 잡아 고기는 토끼고기라고 속여 팔고 가죽으로 외투 만들어 입고 다닌다든지, 삶은 돼지 대가리를 상 위에다 놓고 서열 높은 어른들은 귀, 중간 서열은 코, 어린 것들은 뺨따귀 살을 먹는다든지 하는 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2부와 3부의 내용은 영화하고 거의 완전하게 다른 수준이니,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본 텍스트가 전적으로 <핑거스미스>를 따랐다고 단정하긴 좀 그렇고, 하여간 이 소설에서 사기와 사기에 대한 또 한 번의 사기, 그리고 사기와 또 한 번의 사기 위에 또 한 번의 사기 같은 연쇄 사기, 또 여성 간의 동성애라는 모티프를 얻어 <아가씨>를 만들었다고 봐야 하겠다. 언젠가 말했다시피 나는 <아가씨>를 집에서 유선 Pay TV로 아내와 다 큰 둘째 아들하고 셋이서 봤다. 부모형제가 함께 보기엔 참 바람직하던데, 그건 차치하고, 나처럼 해당 영화와 소설의 관계를 모르고 각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읽기는 재미있게 잘 읽었다. 그럼 됐지 뭘 더 얘기하려느냐고? 그거야 독후감 쓰는 사람 마음이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를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상정한 21세기 작품이라는 것. 2002년에 시치미 뚝 떼고, 쓰레기와 진흙탕, 콜레라가 만연한 19세기 런던에서 공개적인, 차라리 공연이라고 칭할 만한 처형장면과, 온갖 창궐하는 좀도둑과 장물아비, 사기꾼들, 거기다 19세기 중반이었다면 중죄로 다스림을 당해야 마땅했을 동성애까지 다분히 현대적 감각에 의거해 빅토리아 시대에나 썼음직한 문법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청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을까. 세라 워터스는 이렇게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세 편을 썼으며, 이 작품들로 큰 인기도 얻고 당연히 돈도 무척 많이 벌었단다.
 근데 문제는, 물론 독후감을 쓰는 데 있어 생기는 문제를 말하는데, 이미 박찬욱의 영화 속에 공개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은 다 알려져 있어서, 거기다가 더 보탤 말이 없다는 것. 당연히 영화와 다른 2부와 3부에 대하여 쓸 수는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의 2부와 3부가 (소설하고는 다른 내용이지만) 소설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에 별로 쓰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특색 있다고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소설 끝나고 부록처럼 붙은 작가 세라 워터스의 인터뷰이며, 그중에서도 “마지막(질문)으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에 대한 답변이다. 워터스는 네 가지를 주문하는데 다 잘라버리고 요점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1. 미친 듯 읽어라.
 2. 되도록 날마다 일정한 분량의 글을 써라.
 3. ‘다시’ 써라! 잘라 내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4. 계속 노력하라.
 좀 웃었다. 중국에서도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구양수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즉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고 훈수를 둔 적이 있었는데 세월이 한 천 년 지나니까 ‘듣고 생각하는’ 항목은 빠지고 글을 쓰고 또 다시 쓰라는 조언이 추가됐다. 근데, 위의 네 가지를 열씨미 한다고 정말 작가가 되나? 이렇게 해서 작가가 될, 아니, 그냥 작가라는 타이틀 하나 건지는 거 말고, 직업으로 글을 써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작가가 될 확률은 얼마 정도일까. 이게 의심스럽다. 천 명 가운데 하나? 오천 명 가운데 하나? 아휴. 나머지 999명 또는 4999명은 어떻게 하라고 글 쓰는 직업을 갖으라, 권하고 있는지. 팔자에 글 쓰는 살煞이 붙은 불행한 천재 몇 명께서만 한 번 그렇게 해보시면 좋을 듯한데 말입니다.
 알라딘 보관함에 좀 오래 담긴 채 있는 작품 가운데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다. 그런데, 현대적 시각을 장착하고 19세기 잉글랜드의 런던을 무대로 한 세라 워터스를 읽고 나서 과연 찰스 디킨스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지금 이 고민하고 있다. 보관함에서 빼버릴까? 말까? (결국 독후감을 쓴 며칠 후, 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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