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열매들
다니엘 페낙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으로 페나크의 말로센 시리즈는 그만 읽기로 했다. 책이 재미가 없거나 읽기에 부족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 식상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이해하기는커녕 제대로 발음할 줄도 모른다. 그래 잘 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어 문장으로만 보면 정말 기막히게 맛있는 번역을 한 김운비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원작인 말로센 시리즈, 동화작가이기도 한 다니엘 페낙의 엉뚱하고 비과학적이고, 우화적이고, 무엇보다 동화적인 이야기를 시리즈로 좇아가며 더 이상 읽는 건 도무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역시 장남 말로센을 비롯한 일곱 명의, 아버지가 다 다른 형제자매들, 자매들이 낳은 아이들과 자기 아들이 연계되어 큰 사고를 치고 또는 큰 사고에 연루되어, 이 ‘부족’ 가운데 한 명의 범인으로 지목을 받지만 동네사람들을 비롯해 직장동료 및 사장인 자보 여왕, 심지어 두 명의 경찰과 아랍인 건달까지를 아우르는 우호적인 커뮤니티의 협조와 주인공 말로센의 눈부신 활약으로 혐의를 벗는 건 물론이고 사건까지 해결한다는 공식이, 이제는 지겹기가 한량이 없어서.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정열의 열매들’은 일종의 유아 돌봄 시설의 간판이다. 수녀이며 한 때 형사로 활약하기도 했던 제르베즈 수녀가 운영을 하는데 말로센의 조카와 친아들도 여기에 다니며 유아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로 지역의 창녀들이 자기 뜻과는 달리 만들어놓은 자식들이 대부분으로, 제르베즈는 이 아이들을 위한 시설의 이름으로 아이들의 정체성과 반대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 던져질 때는 어땠는지 모르나 살면서 그렇게 자라나길 바란다는 소망을 담아 시설의 이름을 ‘정열의 열매들’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제목이 확정되는 순간은 거의 언제나 마찬가지로 작품의 맨 끝에 가야 해명이 되는 바, 거기까지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산문팔이 소녀>에서는 누이동생 클라라가 교도소장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날, 결혼식장인 교도소로 온 부족을 동반해 가고 있는 도중, 드디어 결혼식장이자 교도소가 눈앞에 보일 때 쯤, 예상지도 않았던 폭발사고가 발생, 와중에 신랑이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바람에 아이만 하나 덜렁 낳는 일이 벌어지고, 클라라는 이후 사진 찍기에 집착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클라라의 동생 테레즈는 카드점, 손금, 관상, 점성술, 심지어 동양의 사주, 팔괘, 산가지 등 모든 점술에 능통한 일종의 무녀로 체코 산 캠핑카를 얻어 거기서 온갖 민족 출신의 앞날과 운명을 놀랄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예언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능력으로 인하여 이번 책 <정열의 열매들>의 주인공이 된다. 테레즈가 클라라와 다른 점은, 클라라가 과부가 된 후 사진 찍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반면 테레즈는 결혼을 해 숫처녀 상태를 벗어나면서 여태 잘 타고 놀던 작두날에서 내려온다.
 테레즈가 16세기부터 "진짜" 귀족이었던 유서 깊은 가문의 마리 콜레르 드 로베르발이란 이름의 ‘회계감사원의 감찰관’ 즉 프랑스의 수재들만 모인 회계감사원들을 감찰하는 감찰관과 결혼을 결정한 것을, 고골의 작품 <감찰관>의 영향이 지대했지만, 마리 콜레르의 경우엔 테레즈의 신통력을 이용, 또는 사용해 프랑스 정치를 안정시키기를 원한다는 대의를 내세운다. 뭐 그런 대의를 내세웠단 거니까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 만일 이게 진실이라면, 테레즈는 결혼하는 날 밤 처녀성을 상실함으로 해서 남편이 원하는 신통력을 잃게 되니 이들 부부의 앞날이 어떨지는 더 읽어보나마나 뻔하다. 그야말로 알쪼겠지 뭐.
 여기에 테레즈가 부족원들에게 남편이 될 마리 콜레르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 형님은 목매달아 죽었어요.”
 말로센 시리즈, 또는 다른 추리 소설깨나 읽은 사람들은 책의 발단부분에 나오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이게 저 뒤로 가서 갈등부분에 뭔가 영향을 주거나 받겠거니, 하고 정당한 추리를 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 나중에 뭔가가 있다. 알려고는 하지 마시라.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됐다. 말로센 시리즈의 특징은 언제나 폭탄이 터지고, 몇몇 사람들이 죽고, 말로센 부족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이 감방에 들어가고, 주위 커뮤니티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주인공의 놀라운 능력 덕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젠 이 시리즈를 더 읽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말로센 시리즈 읽는 걸 말리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한 두 권정도 읽어보라고 권할 수도 있다. 어찌 세상 사는데 늘 엄숙하고 진지할 수만 있겠는가. 가끔 책 읽다가 웃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하고 골때리는 상상력에 넋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 김운비의 한국말 실력도 독자를 즐겁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걸 꼭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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