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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뻬루 마을 사람들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김현숙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티보 가의 사람들>이다. 스스로 개전부터 종전까지 참여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로 다음 해부터 무려 20년 동안 집필을 해 1940년에 발표한 대하소설. 이 작품 말고는 열두 해 동안 써왔으나 결국 미완성 유작으로 남은 <모모르 대령에 대한 추억>이 있다고 한다. 뒤 가르가 당시 56세, 최연소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가 1937년. 그러면 아직 <티보 가의 사람들>을 완성하기 전이라, 사실 내용과 관계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하기엔 아직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도 할 터이다. 하긴 탁월한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이 7부와 에필로그로 되어 있으니 그 작품을 연재했다면 상을 탈 수도 있었을 듯하다. 뒤 가르가 필생의 역작 <티보 가의 사람들>에 몰두하던 1931년에 단편소설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를 발표하고 다음 해에도 짧은 소설 <모뻬루 마을 사람들 Vieille France>도 발표한다. <티보 가의 사람들>을 쓰면서 좀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쓰는 틈틈이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니까. 이 책은 뒤 가르가 1931년과 32년에 발표한 두 중·단편을 한 권에 담았다. 솔 출판사가 2003년에 찍은 책으로 지금은 절판이다.
우리나라 출판업계의 불만 가운데 하나가 중역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동서문화사를 제외하면 <티보 가의 사람들>이 절판이며 오직 이 책의 1부이자 작품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회색노트>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제외하고 읽을 수 있는 뒤 가르의 다른 저작들은 아예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비록 헌책이라고 할지언정 어찌 이 책이 눈에 띠자마자 얼른 주워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티보네 집안을 읽어보신 분은 이 심정 동감하면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솔 출판사의 <모뻬루 마을 사람들>의 원 제목 "Vielle France"는 네이버 불한사전을 보면 우리말로 “오래된 프랑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단다. ‘오래된 프랑스’ 말고 더 어울리는 번역은 없을까? 뒤 가르의 관찰의 대상이 되는 모뻬루 마을은 우리나라 읍 정도의 행정단위로 열차 정거장을 중심으로 우체국, 시청(또는 읍사무소), 성당, 빵집, 야채가게, 대장간, 작은 책방, 기타 등등이 있는 작은 시가지와 농사와 목축업을 하는 시골지역을 모두 합친 곳이다. 비록 마을 사람들은 부르주아 적인 사고방식으로 오랜 전통이었던 가톨릭에 입각한 세계관을 벌써 버렸거나 아주 약한 유대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투표를 하면 주민 가운데 90%가 좌파 정당에 표를 던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루한 프랑스 농촌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모뻬루 마을 사람들” 말고 “고루한 프랑스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다른 표현으로 하는 것이 책을 읽으며 빨리 책의 정체를 눈치 채는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뭐 그건 편집자와 역자가 알아서 했겠지.
모뻬루 마을 우체국, 그래봐야 콧구멍만 한 우체국이겠지만, 거기 역시 우체국장이자 배달원이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이 ‘주아노’라고 했다. 이야기는 이 주아노가 하루 온종일 모뻬루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상의 시골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것이 ‘인간적’인 거냐고? 알려드리지. 먼저 우리의 주인공 주아노에 관해 말해보자. 주아노는 젊어서부터 모뻬루 마을의 우체국, 아냐, 아냐, 자꾸 우체국이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해보이니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체국을 조금 작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앞으로는 ‘우편소’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편소에 직업을 얻은 사내로 도로道路 인부 페주를 제외하고는 아직 모뻬루 마을 주민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에 일어나 곧 도착할 우편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 인물. 당연히 결혼을 했다. 오래 전에. 근데, 문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혼자 우편소를 독식하려면 자기가 우체부를 할 동안 우편소 내부를 관리해야 할 터. 그러다가 여차하면 자기 밥벌이를 잃을 수도 있을까 싶어 어떤 조치를 했느냐 하면, 아내에게 우편소 관리 일을 시키는 것. 하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일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육아, 수유, 가사에다가 또 우편소 관리까지는 도무지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어떤 결론을 내렸느냐 하면, 결혼과 동시에 출산의 희망에 부푼 아내에게 자기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땅, 땅, 땅, 나무망치를 세 번 내려쳤다. 설마 우리의 주인공 주아노를 진짜 직업정신이 투철한 우체부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이 인간의 주된 여흥이 무엇인가 하면, 몇 십 년 눈썰미로 척 보면 어떤 것이 중요한 편지인지 알아채, 주전자 증기를 뿜어 쥐도 새도 모르게, 아무 흔적도 없이 편지를 개봉해 은밀한 내용을 미리 읽어보고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위해 최선의 사기를 치는 것도 있는데, 이때 눈부시게 발휘되는 것은 바로 윤활유가 듬뿍 묻은 혀.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감언이설이 청산유수. 그러나 마누라 앞에만 앉으면 밥 먹을 때, 물 마실 때 말고는 절대 입조차 열리지 않는 인간이다.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그리는 고루한 프랑스 시골마을의 사람들이 도시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박하고 정직하고 정이 넘치지 않는다는 점. 하나같이 구두쇠에다가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체면 차리려 다른 이를 무시하며, 작은 이익을 위해 험담하는 건 기본이며, 종교적 자비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 프랑스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에 기대하는 소위 ‘시골인심’이란 건 애초에 없다는 진실을 뒤 가르는 매정하게 가르쳐 주고야 만다. 시골이나 도시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인간의 모습은 다 그게 그거.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듯. 그러면 여기까지.
함께 실린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는 단편소설이라 재미는 있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밝히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