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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ㅣ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9
궈스싱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평점 :
궈스싱은 몇 년 전에 대표작 <물고기 인간 魚人>을 읽은 적 있다. <물고기 인간>은 초기 궈스싱의 희곡에서 <새 인간 鳥人>, <바둑 인간 棋人>과 합해 소위 한량 삼부작이라고 칭한단다. 눈치를 보니 궈스싱이 현대 중국 극작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청개구리>가 올해 봄에 한국에서 낭독공연을 했고, <물고기 인간> 역시 작년에 낭독공연의 형식으로 초연을 했다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물고기 인간>도 그렇고 <청개구리>도 그런데, 이런 형식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한단다. 부조리극, 이라고 해서 괜히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냥 현대극이라고 이해해도 별 탈이 없을 듯. 이미 고전이 된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앨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등을 이제 부조리극이라고 하면서 괜히 어렵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희곡을 읽거나 공연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냥 기존의 연극적 (또는 통틀어 문학적)방법인 발단-전개-갈등-절정-결말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는 대신 그냥 하고 싶은 행위를 순서에 입각하지 않고 펼쳐 보이는 형식쯤이라 설명하면 된다. 나 같은 일반 독자가 드라마를 공부하는 사람처럼 장르의 기원과 내용, 형식 등을 굳이 시간을 내 찾아보고 읽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시도 반시가 있고, 소설도 반소설이 있듯이 연극에서도 어찌 반연극反演劇이 없을까. 반연극을 통째로 부조리극이라고 생각해도, 이미 부조리극이 등장한지 80년이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는 시비를 따질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청개구리>에서 청개구리가 진짜로 등장하느냐고? 그렇다. 작품의 맨 끝부분에 청개구리가 팔딱 거리는 장면이 나오고 당연히 울음소리도 들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청개구리를 뛰게 만들지는 전적으로 연출가 마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청개구리를 잡아와서 무대에 풀어놓지는 않겠지? 내 생각도 그렇다.
등장인물은 네 명. 이발사, 손님, 나그네, 여자. 이발사와 손님은 1막부터 3막까지 쉼 없이 한 명은 이발의자에 앉아 있고 이발사는 가위를 손에 걸고 있다. 내용만 퉁 쳐서 이야기하면, 말 많은 손님과 이발사가 끊이지 않는 수다를 떨고 있는 와중에 나그네가 도착해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의 수다도, 이발 행위도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래 면도를 하고 싶어 하는 나그네는 이들과 말을 섞다가 여자한테 1막에 한 번, 2막과 3막에서는 두 번씩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결국 그냥 발길을 돌린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연극에서 대사를 떼어내면 별 거 없는 드라마이지만, 여기에 현대와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무수한 사건과 자연현상이 첨가된다. 현대의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고, 자기 복제는 앞으로 남성을 더욱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큰 나라의 큰 도시에선 비행기 두 대가 똑같이 생긴 큰 건물 두 동을 무너뜨리고, 인도네시아에서 강도 9.1의 강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발생해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거쳐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북극의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인간의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등의 말잔치가 벌어지는 와중에, 무대가 되는 중국의 평야지대 역시 점점 물이 들어차 이발사와 손님의 다리에 굴과 조개가 번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극작가가 독자, 관객에게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에티켓. 사실이 또 그렇다. 어찌 모든 예술 장르에 스토리나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하나. 만일 고도가 무대에 쓱 등장해서, 만장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 그동안 미천한 저를 기다리시느라 수고 겁나게 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면 그게 베케트의 문제작이 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청개구리>엔 메시지가 있다. 아니, 적어도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극작가 궈스싱은 그것이 사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썼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독자(또는 관객) 역시 그것이 똑 부러지게 무슨 메시지인지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소통은 불확실한 것. 코러스가 무대에 등장해 집단으로 노래하고 사연을 전하던 시절이나, 투명 플라스틱이 프롬프터를 대신하는 시대나 마찬가지로 연출가와 관객, 극작가와 독자 사이에 한 번도 정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니 문학에 반대할 수밖에.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 소위 반연극, 즉 부조리극 아니겠는가. 독자 또는 관객인 당신이 이 책을 읽거나 연극을 보면서 느낀 것, 그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