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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의 밀교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김혜란 옮김 / 연극과인간 / 2001년 4월
평점 :
처음 읽은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 몰리에르의 마지막 11년을 담았다. 몰리에르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타르튀프>. 지금부터 350년 전에 쓰인 희곡으로 기존 귀족, 성직자 계급을 사정없이 비꼬아버린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이며, 원 제목이 <타르튀프 혹은 위선자>이다. 그러면 불가코프의 제목에 나오는 위선자가 누구들인지 대강 짐작이 갈 것.
그런데. 불가코프를 읽는 독자들에게 숨어있는 꽤 큰 함정이 무엇인가 하면, 불가코프의 작품 속에는 알게 모르게 당시 소비에트의 독재자 스탈린 체제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 작품 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실제로 불가코프는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에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을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작품 활동만 허락을 받았던 불운한 작가 그룹에 포함되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런 오해도 한 편으로는 정당하게 보이기도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불가코프가 자신이 처한 체제를 풍자했을 것이라는 독자들의 기대와 탐색이 정작 불가코프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위선자들의 밀교>를 읽어가면서 등장하는 루이 14세, 귀족, 성직자, 근위대장 등을 나도 모르게 스탈린과 고위급 정치인, 비밀경찰로 대입하려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이 작품은 1930년에 소비에트 레퍼토리 총국에 의하여 공연불가 판정을 받은 후 1931년에 제목을 <몰리에르>로 바꿔 공연 허가를 얻어낸다. 이후 무려 5년이 넘는 세월을 연습과 리허설에 바쳐 1936년에 이르러 무대에 올렸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루이 14세 시대에서 벌어진 재판 없는 폭정을 유사하게 풍자했다는 이유로 단 일곱 번의 공연 후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스탈린 시대에 대한 약간의 저항을 포함한 풍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했던 것이 정당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20세기 중반이면(그것도 자유진영의 국민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21세기까지 와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작품의 텍스트에 나오는 그대로를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건 350년 전에 쓰인 <타르튀프>를 읽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허리가 부러지게 웃을 필요도 없고, 웃기지도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1662년 초에 마흔 살, 당시 기준으로 하면 늙은 몰리에르가 주책이 났는지 여배우 아르망드 베자르라는 이름의 여배우를 임신시키고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몰리에르가 원래 부르주아 출신이라 첫사랑이자 연상의 여배우였던 마들렌 베자르와의 사랑이 결혼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바 있어, 마들렌의 동생 아르망드와의 결혼에 작은 뒷소문이 있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는데, 위키피디아가 정확한 백과사전은 아니지만, 마들렌과 아르망드가 자매 사이가 아니라 사실은 모녀 사이라는 풍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불가코프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가, 첫사랑 마들렌과 몰리에르 사이에서 출생한 사생아일 수 있다고, 당사자 마들렌의 입을 통해 발언한다. 마들렌이 예전에 동시에 두 남자와 함께 산 적이 있는데 이때 한 명이 몰리에르이며, 임신을 해서 아르망드를 낳은 건 사실이나 아이가 누구의 딸인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죽음을 앞두고 파리의 대주교 샤롱에게 고백하는 장면. 샤롱은 <타르튀프>에서 성직자를 모독한 몰리에르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터, 아르망드가 틀림없이 몰리에르의 아내이자 딸이라고 루이 14세에게 고변을 해 궁정극장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극장에서 거의 마지막 작품인 <상상병 환자>을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죽는 것으로 처리한다. 실제로 몰리에르가 공연장에서 쓰러진 것은 맞지만 집으로 옮겨져 침상 위에서 죽음을 맞는데 그러면 재미가 덜 하니까 독자가 이해하자.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빼고 초장과 막장만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정작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연출가 스따니슬라프스끼의 연출 노트다. 연극을 연습하고 리허설을 하면서 공연하는 배우, 극작가인 불가코프 등과 의견을 나눈 속기록을 옮긴 것으로 65쪽에 이른다. 서양 사람들은 원고의 분량을 이야기할 때 단어 수를 세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단어 수로 하자면 틀림없이 본문인 희곡보다 더 많은 분량이다. 이 재미있는 노트에서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천재 가운데 한 명인 몰리에르에게 더 극적인 장면을 부여하지 않는 것에 유감을 표명한 반면, 불가코프는 몰리에르 역시 보통의 한 사람으로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타르튀프>를 보면, 작품 내내 귀족과 성직자들의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측면을 신랄하게 야유하고 있지만, 극작가 자신도 결국은 루이 14세의 극장에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 난데없이 “국왕폐하 만세”로 아첨할 수밖에 없던 생활인 아니었나. 뭐 이런 담화보다, 더 인상 깊게 받은 느낌은, 독자 또는 관객 입장에서는 그냥 돈 내고 에어컨이 잘 작동되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지만, 작가, 연출가, 배우, 스태프 등은 한 권의 책, 한 편의 연극을 위해 그렇게나 진지하게 궁리하고, 토론하고, 실제로 연기해보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한 편의 좋은 작품이 어떤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의 부록 격인 ‘연출 노트’를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