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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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소설가. 1996년. 그러면 내가 정영문이란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데 조금은 타당한 이유가 된다. 먹고 살기위해 가장 바쁘게 지냈던 시절이다. 1년 후엔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던 한반도에 외환위기가 닥쳐 회사로부터 당신이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것이 회사의 희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보기엔 어느 때보다 더 바쁘지만 사실은 바쁜 거 없이 바쁜 척하기에 바빴던 시절이 도래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자기 혼자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어느 직장인이 있어 소설 따위를 읽어볼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는 정영문은, 여태까지도 ‘정영목’인 줄 알았던 책 존 파울스의 <마법사>를 번역한 이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글쎄 이이가 소설을 썼다는 거 아니야?
 <어떤 작위의 세계>. 어떤 책보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 어울린다. 난 이 책 딱 한 권 가지고 정영문을 좋아하기로 작정했다. 아직 다른 책을 검색해보지는 않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을 생각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은 2010년 봄과 여름 동안 대산문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물며 쓴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가까운 체류기라고 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표류기’라고 하면, 이 작품이 5년 전 캘리포니아를 방문해 멕시코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전 애인 커플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두 계절을 보낸 스토리는 있을지언정, 그것 이외의 어떤 플롯도 보이지 않는다. 즉, 기존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어떤 서사를 기대한다면 애초에 틀린 선택이란 말씀.
 5년 전에 ‘나’는 캘리포니아 황무지에 있는 전 애인의 별장에서 전 애인의 멕시코 애인을 포함해 세 명이 눈을 뜰 때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데킬라를 퍼마시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두커니 정물처럼 서 있는 용설란을 향해 권총을 쏘아 갈기고, 벌거숭이로 다니는 멕시코 남자의 (당연히 생식기를 포함한) 알몸을 감상하고, 빈둥거리기조차 힘들어지자 함께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악명 높은 짙은 안개 속으로 쳐들어갔다가, 히피의 21세기 버전일 수도 있는 호보Hobo족을 만나 담배를 나눠 피우다가 전 애인 커플을 떠나보내고 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걸로 끝난다. 5년 전의 기억은 5년 전의 기억일 뿐, 전 애인이나 전 애인의 애인이 ‘나’에게 베풀었거나 ‘나’가 베푼 의식주 및 여흥 또는 유흥, 심지어 용설란을 향해 불을 뿜던 권총, 용설란에다 힘찬 오줌줄기를 뿌리던 ‘나’의 전 애인의 현 애인의 비뇨기 등이 5년 후인 2010년 봄과 여름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도 않고, 2010년 봄과 여름에 ‘나’가 다시 다른 호보를 만나거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관심을 쏟거나 금발의 조그만 여자 아이에게 복수심을 품거나, 샌드위치에 뿌려진 마요네즈를 걷어내기 위해 깨지락거리는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 정영문 혹은 작가 혹은 <어느 작위의 세계>에 등장하는 ‘나’가 2010년 봄과 여름에 걸쳐 샌프란시스코와 감깐 동안의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그냥 쓴 작품.
 이런 의미에서 <어느 작위의 세계>는 작가의 말처럼 ‘표류기’라고 보기 힘들다. ‘나’는 대산문학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발적으로 도착했으며, 애초부터 그곳에서 목적을 갖고 하다못해 금문교 위 서쪽에서 666미터 지점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하나 없이, 초장부터 멕시코에도 우드스톡 같은 히피문화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둥의 힌트를 주면서 오직 하나, 일 하지 않기, 노력하지 않기, 심지어 빈둥거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도 도전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무위의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야? ‘나’의 두뇌는 마음과 달리 세밀함과 광대함 사이에서 자유로이 말장난을 하고, 근거 없는 무의미들을 탐색한다. 물론 탐색에 성공을 했는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어쨌든 말장난에 관한 한 무난한 성공을 거두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간혹 얼굴을 구기며 웃게 만들기도 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과장하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으면서 주위에 실재하거나 사람의 심리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정확한 표현을 해내는 정영문이라는 작가. 좋다. 기꺼이 또 다른 책 한 권을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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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휴가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가
결국 못 다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무작위의 작법이라고나 할까요.

저자가 번역을 맡았던 이창래 선생의
어떤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Falstaff 2019-08-05 13:5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전형적으로 독자의 취향에 의해 호, 불호가 갈릴 거 같더라고요. ㅋㅋㅋㅋ
맞고 안 맞고는 완전 팔자소관입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