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대 - 열아홉 살 엽기소녀의 반위생학적 사랑법!
샤를로테 로쉬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난 가족 단위에서 노인 간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듯 나도 우리 부모님이 다시 합치는 게 소원이다. 엄마 아빠에게 간병인이 필요하게 되면 엄마 아빠의 애인들만 양로원에 집어넣고, 이혼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집에서 돌볼 테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 침대에 눕혀놓고. 이 상상은 내게 최대의 행복감을 안겨준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거다. 언젠가는 내 손 안에 들어올 문제다.”

 첫 문단이다.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소설은 한 결손가정 출신으로 이제 19세, 법적으로 성인이 된 여성 헬렌 메멜 양이 이혼한 부모가 재결합 해 다시 한 가족으로 살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는지가 핵심이다. 헬렌은 열세 살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과 성적 접촉을 해왔고, 마약을 복용했다. 무대가 아무리 유럽, 독일이라 해도 이 정도면 전형적인 ‘결손가정 출신의 문제아’이긴 하지만 부모가 이혼한 아이가 헬렌 혼자도 아닐 터인데 이리 유난을 떠는 건,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엄마가 동생 토니와 함께 졸피뎀을 먹은 듯 주방에서 깊은 수면에 빠져 있고 대형 가스 오븐의 열린 밸브를 타고 프로판 가스가 무한정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헬렌이 직접 발견해 엄마와 동생의 동반자살을 막았던 사건이 어린 인생의 한 가운데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봐야겠다. 작품 속의 부모 어느 쪽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인, 일상적으로 통용하는 위생관념에 의도적으로 반하는 행위를 헬렌이 수시로 저지르고 그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 이상행위를, 이제는 낡아빠진 프로이트적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의 이상행동이 비위생적인 생활방식과 성기와 항문에 집중되니 이리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19세가 되어, 아직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인종차별주의자 농부가 운영하는 야채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약간의 차별을 받은 에티오피아 출신 남자 카넬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제모를 배운다. (카넬은 헬렌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성적 접촉을 갖지 않는다. 헬렌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대체로 소수자 및 약자들 가운데 선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니까 이상하지는 않다.) 그가 헬렌의 전신을 아주 말끔하게 면도를 해주었더니, 예상외로 헬렌의 성적 흥분의 세계에는 신세계가 펼쳐지는 거였다. 그래서 이젠 자기 혼자 정기적으로 제모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빠 쪽을 닮아 치질이 있다는 것(엄마와 외할머니는 치질이 없다고 하니까). 그것도 좀 심한 편이라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 마치 꽃양배추처럼 활짝 펴질 정도. 의사 말에 의하면 그저 삶의 질이랄까, 자존감이랄까 따위에 스크래치가 좀 갈 수 있지만 고통을 수반하지도 않고 특별히 염증도 일으키지 않으니 그냥 관리하면서 살면 된단다. 문제의 근본이 이 치질은 아니다. 항문 근처에도 몇 가닥 안 되지만 털이 나 있어, 면도에 익숙하지 않고, 매사를 꼼꼼하지 못하게 대충 처리하는 덜렁이 성격의 헬렌이 극히 요망한 자세로 항문 주변의 털을 면도하다가 그만 주름 근처를 벤 것이 탈이었다. 부위가 부위인 만큼 수도 없이 많은 세균이 번식하는 영양 많은 환경이라 염증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서, 예상대로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 염증이 발병해, 수업 도중 교사의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통에 관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염증에 의해 부어오른 치질이 이제 온 힘을 다해 면도상처를 헤집는 거 같은 고통이 헬렌의 19년 동안 겪었던 고통 중에 가장 심한 고통이란다. 두 번째로 치는 것이 차 트렁크에 몸을 숙이고 있는데 아빠가 실수로 트렁크 덮개를 등골에다 내리 찍었을 때였으며, 셋째로 많이 아팠던 건 스웨터를 벗다가 젖꼭지의 피어싱이 떨어져나갔을 때였단다. 그래서 헬렌은 지금도 오른쪽 젖꼭지가 마치 뱀의 혀처럼 보인다는데, 트렁크 덮개에 찍힌 등골의 아픔은 얼마 정도였을까. 그리고 지금 앓고 있는 항문 염증의 아픔은 두 번째 아픔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모든 인류는 항문염증에 각별한 공포를 갖고 그곳의 위생관리에 미리미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종합병원에 입원해 문제의 염증 말고도 소위 ‘꽃양배추’마저 말끔하게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우리의 헬렌. 헬렌의 속셈은 여기서도 다른 곳에 있다. 딸이 아프다는데 부모가 문병을 안 오지는 못할 거 아닌가. 그럼 여기서 엄마와 아빠가 몇 년 만에 재회를 하고, 비록 지금 각기 다른 가정을 갖고 있긴 하지만, 둘이 다시 사랑의 불꽃을 피우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혹시 아나, 둘이 재결합해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게 될지. 인간사를 누가 있어 알리오. 안 그랴?
 내가 지금 말은 이리 쉽게 하지만, 정작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걸? 위와 같은 심오한 잔머리를 굴리는 헬렌이지만, 메멜 양이 열세 살부터 저질러온 갖가지 엽기 행각을 온갖 방식으로 하도 화려하게 묘사를 하는 바람에 완독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독자서평’을 통해 이런 엽기 내용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얼마나 엽기일까,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상상 이상이다. 여태까지 나는 주로 항문과 꽃양배추에 관해서만 언급을 했다. 근데 책에선 꽃양배추 밭 바로 옆에 있는 놀이동산에 대한 상세한 서술까지 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놀이동산과 꽃양배추 밭에서 즐길 수 있는 갖가지 비위생적 방법에 관한 비 학술적 주장까지 보태고 있으니 잘 생각해보시고 책을 고르실 사. 역자 김진아도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편견도 없이 독자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웃고 싶은 곳에서 웃고, 내던지고 싶을 때 내던질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이 책은 중고를 샀다. 헌 책을 구입하는 일의 재미 가운데 하나가 먼저 읽었던 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 책을 넘겨 첫 빈 페이지에, 아후, 아래와 같은 헌사가 쓰여 있었다. 사진을 찍어 올릴까 했지만, 혹시 아는가, 필체로 전 주인을 알아보실 분이 있을지. 그래 그러지는 않고 그대로 옮겨본다.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 아래에서 처음 너를 만났고…
    잔잔한 호수 같던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주었고…
    따가운 햇빛을 따뜻한 햇살로 바꿔준 J…
                           사랑해

   From A."

 A가 J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으로 보이는데, 글쎄, 이 책을 연인에게 선물을 해? A, 참 대단하다. 난 마누라한테도 읽어보라 권할 생각이 나지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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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3-2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세요? @@@@@@

Falstaff 2020-03-29 18:40   좋아요 0 | URL
윗 글을 좀 길게 써서 그렇지 사실 본문의 10% 정도만 공개한 거거든요. 왜 입원하게 됐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읽으신 분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시면 스포일러 맞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