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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오에 겐자부로의 등단 50주년 기념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25세에 등단을 했다니 어느덧 75세, 아무리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일본이라 하더라도 노익장이다. 참 쑥스럽게도, 그동안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 작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소설가임에도 여태 사 읽어보길 머뭇거렸다는 걸 고백한다. 그러나 역시 오에 겐자부로.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
작품은 책 속에는 알파벳으로 Kenzaburo라 쓰인 작가가 화자로 등장하고, 다른 작품을 통해 일찍이 탄생에서 중년에 이르기까지 성장과정을 독자들이 다 지켜봐왔던 작가의 아들 히카리도 작품의 서장과 종장에 중요 인물로 활약한다. 자폐증세를 앓는 대신 음악에 천재성을 보이는 아들 히카리와 일흔이 넘은 작가가 시내에서 있었던 콘서트를 보고 귀가하던 중 갑자기 히카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다. Kenzaburo가 누군가. 10여 년 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낸 사람. 순식간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일본인 특유의 친절 공여에 관한 제의가 쏟아지지만, 5분만 저러고 있으면 괜찮아지니 상관하지 말고 가던 길 가시오, 라는 무뚝뚝한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5분은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히카리를 부축하며 귀갓길을 서두르던 ‘나’의 화면 속에 저 먼 기억 속의 인물 하나가 찍혀 있었던 것. 대학 동창 고모리.
작가가 고모리를 만나면서 순식간에 소설은 본론으로 접어들어 무대가 30년 전으로 바뀐다. 1970년대 중반. <미하엘 콜하스>라는 책이 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사람이 1810년에 쓴 단편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창비가 번역 출간했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유럽에서 민란을 다룬 아주 드문 작품이며, 민란을 소재로 한 것 답게 당시 사회, 정치 등에 대한 비판과 종교 등에 관해 생각할 것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폰 클라이스트가 1777년 생으로 그의 출생 200년을 기념해 영화인들이 모여 대표작 <미하엘 콜하스>를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영화를 세계 각 대륙에서 제작한다는 M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동학혁명에 맞추어 제작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이 때를 맞춰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던 김지하를 잡아들여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화자의 대학동창 고모리가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마침 작업이 없어 쉬고 있던 Kenzaburo가 그의 작품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던, 두 번에 걸쳐 시코쿠에서 발생한 민란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그래 소설의 본문에는 <만엔 원년의 풋볼>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나오게 된다. 패전 후 불법으로 고급종이를 만들어 화가들에게 팔아 돈을 번 ‘나’의 어머니가 시코쿠에 극장을 짓고 메이지 유신 당시 발생한 민란 가운데 두 번째 사건에 관한 연극을 공연해 스스로 주연을 했다는 것, 1차 민란에서 옥사한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죽은 맏아들의 뜻을 이어 소위 ‘환생한 메이스케’ 자신이 다시 낳은 아들과 함께 두 번째 민란을 도모했다가 잡혀 아이는 돌에 눌려 죽고, 어머니는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맞았던 향토사적 진실, 그러나 일본 국민이 흔히 그렇듯 공식적으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불행한 과거를 마치 해원解寃 굿처럼 공연했다는 것이 다시 나온다. (오에 겐자부로야말로 지식인이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창피한 과거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익사>에서 큰 상징을 갖는 상해에서 도착한 아버지의 붉은 가방도 <… 애너벨 리…>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리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애너벨 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1935년생의 ‘사쿠라’라는 여배우가 등장해서이다. 종전과 동시에 고아가 된 사쿠라는 일본,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활발하게 영화 활동을 했으며, 특히 미국과 멕시코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미군 장교였다가 종전 후 일본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한 데이비드가 그녀를 후원해 아역배우에서 시작했던 터였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조그만 문제가 생겨 출국당하지 않기 위해 데이비드와 법적 결혼을 해 현재에 이른 여인인데,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의 기억 속에 확실하지 않은 불안 또는 불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이런 사쿠라가 만엔 원년에 있었던, 특히 두 번째, 민란에 대단한 흥미를 느껴, 영화화 하고, 자신이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소설은 드라마틱한 꼭짓점으로 몰려가는데, 그곳에 어떤 장면이 있을까. 안 알려드림.
겨우 227쪽에 이르는 짧은 장편이다. 게다가 <익사>,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벌써 충분히 알고 있던 내용이 큰 흐름으로 흐르고 있다. 만일 내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이 책을 읽었을까? 안 읽고 말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제 늦게나마 읽었다는 게 다행스럽다. <… 애너벨 리…>는 기본적으로 한 불행한 인간의 치유의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번엔 작가 본인, 처자식, 가족, 고향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치유? 안타깝게도 그것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오에 겐자부로. 이이의 작품은 믿을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