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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불꽃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3
톰 울프 지음, 이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본문만 1,050 쪽이 넘는 장편소설. 뉴욕, 그것도 그냥 뉴욕이 아니고 센트럴 파크 전경이 발 아래로 굽이치는 파크 애비뉴 10층의 복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채권 전문 엘리트 딜러 셔먼 매코이. 연 수입 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와스프. 키 크고 각진 넓은 턱을 갖고 있는 건장한 몸매, 예일 졸업에다가 전직 법률회사 사장을 부친으로 둔 뉴욕 시민 가운데 천분의 일에 드는 현대판 귀족. 현재 38세. 이이가 주인공이다.
처음에 셔먼이 저지르는 짓을 보면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히트작 <배빗>의 주인공 배빗 비슷한 종자가 벌이는 나약하고, 소심하고, 비겁하고, 우쭐거리는 속물의 1980년대 귀족 버전 아닌가 싶다가, 드디어 사건이 벌어지면 도처에서 쏟아지는 80년대 형型 배빗들은 물론이고, 톱클래스 와스프들의 숨 쉴 틈 없는 과시전쟁과, 불쌍한 주인공 셔먼의 몰락과정, 현대 저널리즘의 선정성, 사기꾼에 근접한 성직자, 차기 선거에 당선하기 위해 애먼 사람 하나 정도는 기꺼이 골로 보낼 수 있는 검찰 수뇌 등등, 온갖 잡놈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톰 울프가 미국인이라서 양심상, 거의 한 명 등장하는 정의의 파수꾼은 사법부 소속인 코비츠키 판사이지만 이이의 노력도 다중의 농성 앞에서 쫓기듯 도망하게 된다. 곳곳에서 이런 온갖 잡것들의 아우성으로 인해 독자는 씩, 엷은 웃음을 짓게 되지만,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뉴욕,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속물성에 진저리를 칠지도 모른다.
딸 캠벨 하나를 두고 1980년대 현재 시가 320만 달러짜리 최고급 아파트에서, 직업이 인테리어 전문가인 아내와 (아울러 하녀 두 명과) 함께 사느라 인테리어 전문가가 사들인 초호화 가구와 골동품에 둘려 살면서도 수컷의 공허를 인내하지 못하는 셔먼.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만다. 상대는 남부 사투리를 쓰는 20대 후반의 미녀이자 일흔한 살의 남편과 결혼해 지금은 남편이 얼른 죽어주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껌벅 넘어가는 몸매의 마리아 러스킨. 이 여자의 치명적 결함이자 숙명은 남자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거. 근데 합법적 남편 러스킨 씨가 일흔한 살의 노령으로 도무지 자신의 갈급을 해소하는데 역불급이라, 간식거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그녀의 안테나에 걸린 백인, 앵글로 색슨 출신, 장로교인, 부르주아, 여기에다가 건장하고 수려한 외모를 겸비한 셔먼이 등장했으니 어찌 이를 놓칠 수 있나. 마리아는 시내 모처에 월 332 달러를 지불하는 방을 하나 얻어 수시로 셔먼을 초대해 스스로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던 것. 물론 셔먼 한 명이라고는 믿지는 않으시겠지?
그래, 소설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 불륜이다. 소설이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 진짜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셔먼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차마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전화통화를 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다 때마침 외출에서 귀가하던 아내 주디와 마주치고 만다. 하필이면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저녁과 밤 사이에 평소 즐겨가던 산책길이 아니라서 구태여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 네 발로 버티고 있는 개를 질질 끌며 드디어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선 셔먼. 기계적으로 다이얼을 돌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와 셔먼은 서둘러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마리아, 나야.” 상대가 대꾸하기를, “셔먼, 거기서 뭐해.” 아이고 저런, 마리아와 접선장소인 원룸이 아니라 엉겁결에 자기 집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던 것. 이쯤이면 이 책 속에서 독자는 무수하게 잦은 희극적 장면을 읽게 되리라 기대해도 좋을 듯. 그래 집에 돌아와 아내 주디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고 또 빌어, 딸 캠벨 때문에, 사실은 연간 백만 달러의 수입을 가져오는 셔먼 같은 남자를 또 찾기 힘들 거 같아, 그냥 살아주기로 마음먹게 만들지만, 셔먼 입장에서도 이것을 기회로 마리아와 결별을 하기엔 마리아가 너무 어여쁘고 그 살이 그립던 거다.
그리하여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리아를 마중 나가 4만 불짜리 메르세데스에 태우고 밀회 장소로 향하던 중, 아차 하는 실수로 뉴욕의 빈민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들만 득시글거리는 우범지대로 들어서게 된다. 길을 찾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며 배회하던 중 장애물 때문에 정차하게 되고, 셔먼은 내려서 차를 막고 있던 타이어를 치우고 있는데 흑인 청년 둘이 “뭐 도와줄 거 있나요?” 다가온다. 범죄가 만연한 우범지역에서 고가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있는 백인 남녀. 나라도 섬뜩한 기분이 들 거 같다. 그래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곱상하게 생긴 흑인 청년 하나와, 몸 좋은 건달 체형의 또 다른 흑인 청년 한 명이 접근하는 것을 강도행위를 저지르기 위해서라고 단정한 셔먼은, 공포에 질려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건장한 청년을 향해 타이어를 던져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잠깐 혼돈의 시간이 지나갔는데, 마리아가 문을 열더니, “슈먼(남부지역에선 셔먼을 슈먼이라 발음한단다), 빨리 타,” 하고 소리치는지라 얼른 차를 타고 지상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조수석에 앉은 셔먼이 잠깐 사이 차에 뭔가가 부딪힌 듯한 소리, 약하게 퉁, 하는 느낌이 들어 영 개운하지가 않다. 그래 마리아에게 묻는다. 자기가 뭔가를 친 거 같은데, 혹시 키 큰 아이 아니었을까? 지금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 마리아가 생각하기를, 셔먼이 완전 바보다. 공개적으로 자기들이 지금 불륜관계라고 떠들고 다니라고? 걱정하지 마, 운전은 내가 했고, 사고를 쳐도 내가 쳤어. 우린 막 정글에서 강도 둘을 떨치고 도망가는 길인데 왜 그걸 신고해야 해.
책은 초장에 벌어진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인해 발칵 뒤집어지는 뉴욕 전체를 다루고 있다. 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 뉴욕에 폭풍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등장인물만 간단하게 소개하자. 성공회 흑인 목사 베이컨이 사건에 개입한다. 목사라기보다 선동가이자 사기꾼 비슷한 캐릭터. 흑인 집단 거주지에서 번호판이 R로 시작하는 고급 메르세데스가 착실한 청년이자 대학진학을 계획하고 있던 램 군을 치어 코마 상태로 만든 사건을 대대적인 인종차별 행위로 확장시켜버린다. 이게 가능했던 건 정치검사로 현재 브롱스 검찰의 수장을 맡고 있는 에이브 와이스가 다음 선거에서 흑인들의 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국인 알코올중독자이자 전형적인 옐로페이퍼인 ‘시티라이트’의 기자 피터 팰로가, 마치 검찰이 피해자가 흑인이기 때문에 사건을 묻어두려고 한다는 취지로 이 사건을 취재해 특종을 터뜨려버려, 에이브 와이스는 맹목적으로 우리의 와스프 부르주아인 셔먼 매코이를 기소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맥코이는 능력은 있지만 돈을 밝히는 형사법 전문 변호사 킬리언에게 사건을 위임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려 상대방 검사이자 에이브 와이스의 부하인 크레이머 검사와 진검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이 난장판이 어떻게 끝날지는 절대 안 알려줌.
굳이 말하자면 블랙 코미디. 처음엔 <배빗> 같다가, 중간에는 길게, 그냥 대중소설 같다가, 나중엔 시대를 잘 비틀어 쓴 풍자소설로 규정해야 하는 재미있는 책. 시간 하나는 참 잘 가더라. 작가 자신이 저널리스트 출신이라 그런지 현장감이 생생하다. 민주주의는 절대로 가장 선한 정치제도가 아니다. 아직 철학자, 정치가들이 이보다 더 나은 정치제도를 찾아내지 못해 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