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잔혹극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2
다닐로 키슈 지음, 조준래 옮김 / 책세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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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좀 그렇다.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잔혹극”이라니. 이렇게 해 놓으면 영락없이 장편소설. 그러나 정말 읽어보면 일곱 편의 단편소설 연작. 연작은 연작인데 작품간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다. 그래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이라기보다 ‘일곱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에 더 가깝다. 이 책을 쓰기 몇 년 전에 낸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에서도 죽음에 관한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이 서로 약한 연결고리로 묶여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번엔 폭력에 의하여 잔혹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무하고자 하는,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행위들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첫 작품 <장미나무 손잡이가 달린 단검>에서는 ‘미크샤’라는 청년과 랍비 정도 되는 멘델 선생이 등장한다. 멘델 선생의 닭장에 간혹 스컹크란 놈이 들어와서 닭을 잡아먹는 바람에 멘델 선생이 밤새 보초를 서도 이 스컹크가 또 영물이라 잠깐 자리를 빈 새를 포착해 닭이면 닭, 달걀이면 달걀을 훔쳐가는 터라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걸 본 미크샤. 선생님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하고는 뚝딱거리더니 덫을 하나 만드는 거였다. 원래 미크샤가 손이 발라 단추 하나 다는데 10초가 걸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니나 달라, 보기 좋은 덫을 만들어 미끼를 달더니 득달같이 스컹크를 잡아버렸다. 근데 하는 짓 좀 보자. 뚜껑을 조금 여니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스컹크란 놈이 주둥이를 내밀 거 아닌가. 그 순간 힘을 다해 뚜껑을 내리친다. 그럼 코를 포함한 주둥이는 어떻게 되겠어? 세게 찧는 거 아냐. 얼마나 아프겠나. 그건 다음 문제고, 그러더니 철사로 코를 꿰고 다리도 묶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아이고, 참 인정머리도 없지, 장미나무 손잡이가 달린 단검의 끝으로 스컹크의 목둘레에 심홍색 목걸이처럼 시원하게 원을 그린 다음 두 발목 위에도 칼자국은 낸다. 뭐하는 거냐 하면, 아직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거다. 자신이 시원하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장면을 보고 있던 멘델 선생에게 자랑삼아 하는 말이, “멘델 선생님, 당신은 영원히 스컹크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멘델 선생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예언자의 목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나 닦아내게. 미크사트 씨. 자넨 저주받을 걸세.” 여기서 이 단편이 끝나는 건 아니다.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맞습니다. 소설작법 2장 1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들어맞는지는 안 알려드림.
 다닐로 키슈는 유대인이며 헝가리에서 태어나, 그리스 정교로 개종했다. 그의 부모, 조보모도 개종했다. 헝가리에서 유대인 차별법에 의거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목전에 두고 부모는 키슈를, 조부모는 키슈의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과 아들(내외)의 개종을 서둘렀던 것.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개종하는 행위에 대한 고찰은 여섯 번째 단편 <개들, 그리고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데, 14세기 남 프랑스 툴루즈 시를 무대로 하고 있다. 천국과 지상 모두의 천국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않는 모든 이교도의 씨를 말려버리는 폭력. 선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졌던 집단 살해와 린치와 개종의 협박이란 역사 사실을 토대로, 위해의 위협으로 인한 개종이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로마 가톨릭 주교와 교황에게 직접 질의를 하는 개종유대인. 당연히 효력 없음의 판정에 의하여 주인공은 다시 모세의 믿음으로 물러가긴 하는데, 모든 재산과 책과 동족은 깡그리 사라진 후.
 이 책에서 키슈의 시각은 바로 위에 쓴 유대인 탄압과, 소비에트 연방 체제에 의하여 저질러진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체제는 튼튼한 것 같은데도 쉼 없이 스파이, 고정간첩 사건이 벌어지고 당연하게도 무고한 과거의 혁명가, 지사志士들에게 이름 앞에 ‘배신자’라는 더러운 타이틀을 씌워진 채 죽어간다. 그냥 조용히 끌고 가 총살에 처하는 아량이라도 베풀어주면 고마울 것을 자신이 독일, 영국 등 서방국가의 스파이 짓을 했거나, 우두머리 스파이 누구를 위해 봉사했다는 허위 자술서에 서명시킬 요량으로 갖은 고문을 자행한다. 소비에트 최고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아니, 페두킨에게는 하나의 공식, 원칙이 있다. ‘심지어 돌멩이도 그것의 이빨을 부러뜨려놓으면 입을 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보리스 다비도비치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문은 자기 앞에 무고한 새파란 젊은이를 세워놓고 페두킨이 젊은이에게 하는 말. “보리스 선생이 시인하지 않으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보리스가 시인하지 않자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 발사되고 젊은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고문은 왜 하는가. 페두킨도 그렇고,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고문 명인 이근안도 그랬을 것이다.
 “페두킨의 분노와 충직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피의자들의 이런 감상적인 자기중심성, 자신의 ‘결백’과 자기만의 조그만 ‘진리’―단단한 두개골의 자오선에 둘러싸인 채, 소위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원을 따라 빙빙 돌아가는 신경 물질의 회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를 입증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병적인 욕구였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그들의 이런 맹목적인 진리가 보다 높은 유일 진리의 체계 속으로 편입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공공을 위하여’ 조서에 서명하는 것은 이성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행위라는 그런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페두킨에게는 모두 철천지원수인 셈이었다.” (143쪽)
 그렇다. 고문조차도 행위를 함에 있어서 자신의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명인 Maestro가 될 수 있는 법. ‘보다 높은 유일 진리의 체계’인 사회주의나 ‘정당한 독재’를 위하여 희생하지 못하는 덜 된 인간을 단지 육체적으로 아프게 한 것뿐인데 뭐.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책 속의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런 의미에서 잔혹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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