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시선 316
이기인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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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이기인이란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그리하여 그가 1967년 인천 생이며,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책의 앞날개 소개말만 읽고, 어쨌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니까, 먹고 살만 한 시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전제로 시집을 여니 첫 페이지에 “최하림 선생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헌사가 쓰여 있어,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선생을 사사하고, 시집이 나온 2010년에 졸한 스승을 애도하는 시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시를 읽어보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전문. 띄어쓰기가 어긋나지만 원문에 따랐음. 이하 인용시도 같음.)



 시는 은유의 잔치. 시인 이기인이 은사 최하림의 진짜 등뼈를 쓰다듬어본 적이 있을까, 없을까. 사우나 같이 가봤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생의 시를 가슴으로 읽었다는 은유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은사의 시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으니까. 매우 아름다운 시다.
 내가 시집을 고르는 방법은 언젠가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요즘 인터넷 책방에서 미리보기 기능을 써 앞쪽에 있는 시 몇 수를 읽고 마음에 들어야 구매하는 것. 이 책 역시 첫 번째 시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가 마음에 들어 사게 됐다.
 그런데, 시집을 읽어가면서, 첫 번째 실린 시가 내 생각처럼 문창과 은사 최하림을 기억하는 헌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 정철의 <관동별곡>을 천하에 둘도 없는 연애 시로 읽은 거하고 비슷한 기분이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난 ‘당신’은 하필이면 시집을 낸 2010년에 죽은 은사 최하림일 수도 있지만, 이후 고르게 등장하는 시적 대상, 과일장수, 장발의 지저분한 거지, 청소부, 철거지역 주민, 건축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공장 노동자, 나이 든 농부 등등 세상의 모든 약자들일 수도 있다. 뒤에 해설을 읽어보니 이기인의 처녀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에서 ‘ㅎ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를 소녀로 호칭했다가, 이제 처녀시집 속의 소녀들이 시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 각계각층의 약자가 되어 있어 그들을 노래한다는 의미로 씌어있다. 암만해도 해설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자.



 소금꽃


 그날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지 못한 것은 공장에 피어 있는 꽃 생각 때문이네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있는데
 그 꽃들은 생일도 없이 한줄기 꽃으로 혼자서 피어 있네
 일하는 사람의 젖은 작업복을 보면서 한나절을 걱정한 적 있는데
 그의 등에 소금꽃이 하얗게 핀 걸 나중에 나중에야 보았네
 등에 핀 꽃을 보지 못하였던 이, 밥풀 냄새 나는 젖은 가슴만을 안고서
 그날에
 버석버석한 웃음 흘리며 한송이 꽃처럼 흔들, 흔들거렸네
 그날에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이는
 공장에서부터 따라와 그의 등에 미안하게 앉아 있는 하얀 소금꽃이었네  (전문)



 아름다운 시다. 근데 좀 이상하다. 시인은 관찰자에 머문다.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는 운동성을 시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왜 그럴까. 21세기라서? 땀이 말라붙어 등판에 남아있던 소금의 결정이 셔츠에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동료의 생일 축하 자리에 가는 일은, 공장에 샤워 시설이 없다는 뜻이다. 아직도 그런 현장이 남아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런 공장에서 기꺼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이 시에서는 조금도 밝혀주지 않지만 나는 등짝에 소금꽃을 피운 채 생일 파티에 참석한 노동자가 외국인이라는 데 만원 건다. 그래서 시의 운동성이 없는 걸까? 시를 책상 위에서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만국의 노동자라는 건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라서?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책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그동안 시인의 아이가 심장수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곤궁과 고뇌를 겪으며 한줌 시를 소망’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어찌 운동성을 유지하는 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다른 수술도 아니고 ‘심장수술’을 견디는 스트레스 속에서 시적 운동성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 시인은 흔히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용산 4구역 철거현장을 노래하면서도,



 달의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밤


 검어진 용산을 지나가는 버스가 멈춘다 불이 난 망루에서 함께 내려오지 못한 이의 외투와 신발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그들의 불안이 치워졌다 그들의 불면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버스에서 내린 검은 얼굴들이 한주먹 파편처럼 길바닥으로 쏟아져나왔다 검게 그을린 뒷모습이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망루에서 뛰어내린 달빛이 이봐요 저기요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타버린 집의 허공에서 살아남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당신의 이야기는 저 높은 곳에 살았잖아요 당신의 이야기는 옛집에 지금도 살아요 불면의 잠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긴 밤을 돌아다니며 달의 쪽방으로 기어들어가 호오 입김을 분다 뜨거운 계단에 주저앉은 아빠들의 이야기는 숯처럼 검은 눈물을 흘린다  (전문)



 아직도 식지 않은 계단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 내일의 새로운 싸움을 약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시를 전형적인 ‘먹물시’라고 칭한다. 지식인 또는 그와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약자나 일반적으로 약자로 인식하고 있는 계급의 주장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의 싸움엔 반 발짝 거리를 두는 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시인이라고 별 수가 있는 게 아니니까. 시를 써서 먹고 살려면 월간 수입도 아니고 연간 5백만 원 벌이로 버틸 수 있는 깡다구가 있거나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시인 역시 소시민이니까. 게다가 노조 가입도 못해 누구한테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는 백척간두에서 물구나무를 선채로 사는 인간들을 우리는 시인이라 일컫는다.



 쌀자루



 마루 위에서 뒹구는
 쌀자루 흰 평구리를 부축하던 아내는 허리가 아파서 누워버렸다
 동전을 모으는 아이는 빈 맥주병을 들고 나가 30원을 받아들고 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낮인데도 형광등을 켜야 신문을 읽을 수 있다니
 나는 슈퍼로 달려가서 맥주병은 50원인데 왜 30원이냐고 따졌다
 아이는 슈퍼 주인처럼 옆에 서서 이 동네에서는 모두가 그래요 한다
 30원을 먹은 돼지저금통의 내장은 그렇게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날 나는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꾼다
 ‘나는 미쳤다’라는 시의 제목을 ‘처음에 나는 미치지 않은 아버지였다’
 가난하지만 시가 변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은행에 가져갈 고지서를 모으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때는 계산이 미숙한 것까지를 좋아했던 아내는 슬슬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돼지저금통을 찰랑찰랑 흔들다 잠에 빠지고
 아이가 갖고 싶은 지구용사 썬가드 로봇은 꿈속에서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아내가 겨우 방문을 열고 나와 쪼그려앉았다
 자루에서 끌려나온 쌀은 오늘 저녁에도 끓어넘친다
 나는 꺼진 촛불처럼 있다가 밥상으로 달려가 정다운 수저 네 벌을 차례대로 눕힌다
 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


 온 가족을 모아놓고 첫술을 떠야 하는데 첫술을 떠야 하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지 씹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문)



 시인 자신이 사회적 약자다. 미발표 시들이나 써 모아놓는 가난한 가장이 어떻게 다른 약자들을 위해 시 속에 운동성을 삽입할 수 있나. 나폴레옹이 했던 말이 진리다. 승리는 위stomach에서 나온다는 거. 운동도, 혁명도, 진보도, 문학도 밥 먹은 후에나 가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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