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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옮김 / 다른우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임레 케르테스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 <운명>과 <좌절>은 전에 독후감을 올렸다. <운명>에선 열네 살 소년 죄르지가 노동봉사대 일원으로 작업을 나갔다가 버스에서 단체 검문에 걸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10개월 만에 부다페스트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다섯 살 죄르지의 일인칭 시점의 눈을 빈 마흔다섯 살 케르테스. 근 삼십년의 세월이 지나, 당시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에서의 존재를 사색해보는 작품이라,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소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던 나치에 의한 잔혹한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운명>을 읽으면서 아우슈비츠에서도 역시 사람은 다만 존재의 문제였다는 것을 조금 밋밋하게 읽었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머리털 한 가닥 차이로 결정되는 와중에 삶을 이어가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을 행운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곳에서의 생멸이 운명이라면, 운명이 삶을 지배할 때 그곳에선 자유가 없으며, 자유(즉 선택의 가능성)가 있는 곳엔 운명이란 없는 것임을 자각한다. 그러하여, <운명>은 독자가 책 속의 이런 메시지를 포착하지 못하더라도 열네 살의 죄르지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시 생환하는 스토리가 있어 색다른 체험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2부인 <좌절>을 읽으면 좀 복잡해진다. <좌절> 역시 일인칭 시점의 작품이다. 주인공 ‘노인’은 아우슈비츠 생환 후 30년이 지나, 당시의 체험을 책으로 쓰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를 하지만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출간하기를 꾸준히 거절하고 있는 상태.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는 불통의 상태를 견디다 못해 노인은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을 만한 소설을 쓰기에 이르고, 그렇게 나온 소설이 작품의 뒷부분이 된다. <좌절>은 앞의 작품 <운명>을 읽지 않으면 노인의 고민, 유대인에 대한 정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생과 사를 가르는 운명, 운명의 당사자가 받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 등을 이해하는데 조금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의 작품보다 읽기가 수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이번에 읽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거대한 에세이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사변적이라 전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노년의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유년시절 가부장적 절대 권위를 누리는 아버지로부터의 애정결핍, 부모의 이혼, 기숙학교의 권위주의적인 규율,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결혼과 이혼을 겪었다. 헝가리의 한 휴양소에서 험악하게 생긴 철학자 오블라트 교수를 만나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질문인 “혹시 당신의 아이가 있나요?”란 질문을 받고 즉각, 본능적인 반발력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이 읽기 힘든 소설은 시작한다.
신에 의하여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 민족에 내려진 축복 가운데 하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인데 유대인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유대인 아버지의 가부장적 훈육,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날아가고 만 유대인 교장에 의한 엄격한 교육과정,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운명에 대한 복종 등은 자신의 복제품 생산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 건 아닐까. 한 모임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 체험에 관해 색다른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아름다운 유대인 아가씨와 많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후에도, ‘나’를 압박하여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착하고 있던 것. 제목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주인공 ‘나’가 스스로 만들기를 거절한, 그래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젊은 아내와 결국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인공불임 또는 자의적 불임 때문에 태어날 수 없었던 미지의 자기 아이를 뜻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내가 읽은 책은 출판사 ‘다른우리’에서 나왔지만 지금 절판. 그러나 올해 하반기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 예정이라니, 미리 결론을 가르쳐드리는 실례를 범하지는 않겠다.
책은 참 읽히지 않는다. 200 페이지를 살짝 넘기는 얇은 장편소설임에도 한 문단을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철학적, 수사적 표현들은 힘들었다.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를 너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너의 없음을 나의 현존재의 필연적이면서 근본적인 자기청산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119쪽)
즉 아이를 태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 지금 나의 근본적인 자기청산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이런 생각을 가진 주인공 ‘나’는, 이미 늙은 ‘나’는 피부과 의사인 전처를 정기적으로 만나 처방전을 건네받으며 의식의 변화를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책이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