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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ㅣ 창비시선 371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평점 :
시인이 서른세 살 때 낸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책에 실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 <흰 이야기>의 두 번째 연, 첫 행이다. 언젠가부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어 가운데 하나를 따서 시집 문패로 붙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시집을 읽지 않아서. 제목이 조금 살 떨리지? 목숨이 두근거린단다. 염통이 두근거리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해야 목숨이 두근거릴까. 이 표현이 들어 있는 시 <흰 이야기>는 토끼가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죽이는 걸 보고 지은 시. 전에 수리부엉이가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토끼도 비명을 지른다. 정말이다. 유병록도 토끼가 고함을 지르는 걸 본 모양이다. “고함이 이렇게 크다니 / 눈도 뜨지 않은 것들, 흰 털 속에 무수한 힘줄을 숨긴 것들 / 무럭무럭 자라 내 목을 조이겠지 나를 몰아내겠지 / 가만히 앉아 당할 순 없어 희생 따위는 / 한무더기 푸성귀만 못하지 / 토끼의 귀가 팽팽하게 일어선다 뭉뚝한 기억을 딛고 / 이빨이 뾰족해진다 / 차례차례 잠든 새끼들의 숨통을 끊는다” 고함을 지르는 것이 어미인지 새끼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는 데 만원 건다. 토끼를 비롯한 설치류들은 자신이 출산한 새끼들의 숫자가 적다고 생각할 때, 생각을 정말 했겠어, 그냥 유전인자에 쓰여 있는 느낌대로 적다는 기분이 들면, 가차 없이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수유기간을 줄여 얼른 다시 임신을 하고, 자신이 잡아먹은 새끼들은 새로 임신할 새끼들을 위한 영양분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에는 낭비란 없으니까. 이런 장면을 본 시인은 그리하여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 흰 토끼가 숨통을 물어 벽에 던진다 / 천둥의 밤이 고요해질 때까지 / 털 속의 불안이 다 지나갈 때까지”라고 흰 털의 죽은 토끼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이것처럼 이 시집은 유난하게 죽음에 관심을 쏟는다. 예쁘장하게 생긴(남자다, 남자) 시인이, 그것도 삼십 초반에 왜 이렇게 죽음에 경도되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대로다. 따져보면 10대 중후반에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인간들이 몇이나 있을까. 인류의 극소수인 야훼의 장자들을 제외하면 말이지. 근데 유난히 섬뜩한 시가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사자(死者)의 서(書)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정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생이 된다더군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양경언은 이 시에 대하여, “문자와 종이의 관계를 뼈와 몸으로 여기는 시인에게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다. 해서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의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섬뜩함은 정말 사람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장정한 책의 사진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피부로 장정한 책이 정말 있냐고? 있다. 서울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하버드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노트르담대학 도서관에도 있다. 그림 첨부한다. 다만 서울대학 도서관의 인피 서적은 도서관 사서의 얼굴이 노출된 관계로 올리지 않겠다. 사람 껍데기 책이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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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은 하버드 대학 도서관 소장 <On the Destiny of the Soul>, 오른편은 노트르담 대학 도서관 소장 인피 서적으로 무어족 족장의 가죽으로 만들었단다.
이런 걸 봐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자의 서>를 읽어보시라. 위 책들이 평론가 양경언이 얘기했듯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라고,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을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이해가 되겠는지. 나는 그딴 거 다 모르겠고, 등줄기와 팔뚝에 오소소 소름만 돋았다. 게다가 몇 번 얘기했듯 일제 코흐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전기스탠드 갓을 만들거나, 서진, 기타 예술품을 흉내 냈던 것도 본 적이 있어 시를 읽고 느낀 끔찍함이 더 했을 것이다.
이 시 말고도 죽음과 시신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 산 채로 매장된 흔적 //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 눈 감으면 / 검은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 검은 공기가 밀려들며 목구멍을 가로막는다”(<검은 꽃> 부분)는데, 시의 제목 ‘검은 꽃’은 “점점 폐활량이 줄고 /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즉 죽음의 순간에 내가 직접 판 검은 구덩이, 혹은 죽은 내 폐에서 발견된 다량의 검은 흙을 말한다.
좋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데 뭐가 문제냐. 근데 나는 왜 시인이 자신이 직접 검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묻혔는지, 그걸 모르겠다. 검은 구덩이를 내가 팠다고 분명하게 얘기하긴 했는데, 구덩이 속에 누워 있으면서 흙을 스스로 덮지는 못했을 것. 그럼 누군가가 시인을 묻었을 터, 왜 묻혔을까? 이웃의 여자를 탐했을까? 과부 땡빚을 얻어 갚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좋다, 좋아. 시인이 왜 괴로운지, 검은 땅 속에 어떤 이유로 묻히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겠다니 뭐 독자가 알아서 그런가보다, 해야지.
결론.
내겐 맞지 않는 시집.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다. 굳이 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추하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요즘 잘 나가는 시인인 모양이니 제위께선 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라. (이렇게 얘기하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속 하나는 편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