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왜 제목을 영어로 썼을까? <잡역부>라고 쓰면 촌스러워서? ‘잡역부雜役夫’도 외래어인데 왜 수선이냐고 한다면, <막일꾼>은 어때? 더구나 부코우스키의 소설에 영어 제목을 붙인다고, 아니, 슬로바키아어 또는 라틴어를 붙인다고 해도 하나도 우아해 보이지 않을 걸? 당신이 부코(우)스키의 소설책을 선택한 순간 일단 고상한 건 포기한 전제였을 테니. 내가 읽은 이 사람의 책은 공통적으로 술과 일시적 밥벌이, 싸움, 섹스의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의 미국남자답게 마초적이다. 이를테면,


 “잔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쳐든 그녀는 술집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아도 꽤 핼쑥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등 바로 뒤로 걸어가서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에 가까이 섰다. ‘난 널 여자답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넌 그저 싸구려 창녀일 뿐이야.’ 나는 그녀를 손등으로 후려쳤고 얻어맞은 그녀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그녀의 술잔을 집어들고 단숨에 비웠다. 그런 다음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출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좋아, 형씨들 중에…… 내가 지금 막 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그렇다고 말해보시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짐작건대 모두들 지금 내가 한 행동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바라도 가로 다시 걸어나왔다.” (164~165쪽)


 여성 ‘잔’은 나, 행크 치나스키보다 열 살 연상의 애인. 치나스키는 1920년생임에도 사회부적응 증이 있어 군 입대를 거절당해 2차 세계대전 참전 와중의 미국에서 희소가치가 있는 멀쩡한 젊은 남자의 자격을 취득한다. 말 그대로 사회부적응 적 성격으로 (내가 읽은 순서로 쳐서)전작에 보면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 동안 저널리즘을 공부하다 때려치우고 전국을 유랑하며 여러 잡일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는데, 이 방랑벽과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고 순식간에 그만두고 하는 행위가 <팩토텀>에 와서 극을 달한다. 이이가 마흔아홉 살 때, 어느 출판사로부터 한 달에 100달러 씩 줄 테니까 책을 써보라고 했다는데, 정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찰스 부코(우)스키 씨는 어느 찌는 듯한 여름 밤 마이애미의 개천 옆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다가 졸지에 악어 밥이 됐든지, 한 겨울 시카고 골목길에서 꽝꽝 얼어 죽은 채 발견되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내가 부코스키의 책을 여러 권 읽은 건 아니다. 근데 뭐랄까,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 볼 수 있듯, 이미 몇 세대 이상이 지나가버린 존 웨인 시절의 향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힘든 행동들을 스스럼도 죄의식도 없이 저질러버리는 전형적인 부랑자, 깡패, 양아치 기타 등등의 모습이, 희한하게도 그냥 넘어가지더라는 것.
 왜일까?
 새벽 다섯 시에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팩토텀>은, 이후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로스앤젤레스, 뉴욕, 다시 로스앤젤레스, 세인트루이스, 또다시 로스앤젤레스(이때 책에서 가장 오래 관계를 갖지만 결국 그녀로부터 사면발니에 감염이 되는 잔을 만난다), 플로리다, 마지막으로 다시 로스앤젤레스를 다니며 이러저러하게 참으로 다양한 잡역부의 삶과, 거대한 양의 위스키와 와인과 맥주 통 속으로 다이빙한다. 미국의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숱한 직업을 가졌다가 때려치우고, 그동안 번 돈으로 끝장을 볼 때까지 술에 취해 아무 여자하고나 섹스를 하는 거. 그러면서도 자잘한 싸움과 노숙 등. 행크 치나스키에게 여성이란 그냥 섹스의 상대자일 뿐. 어디서 본 거 같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뭐 대강 그럴 듯하네. 그럼 찰스 부코스키를 잭 케루악과 같이 비트 제너레이션으로 묶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듯하지만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부코스키를 케루악하고 함께 묶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케루악이 50년대에 그의 특허품인 비트 제너레이션 작품들을 쏟아낸 반면, 진정한 비트 세대인 부코스키는 70년대에야 와서 자신의 젊었던 시절에 관해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 때문일, 한 번 쉬고, 것이다. 짐작이라는 뜻. 다른 데서 인용하지 마시란 완곡한 표현이다.
 일반적인 뜻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책을 선택해 읽는 분들은 킥킥대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가볍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별다른 스토리도, 플롯도 없고, 구성도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행크 치나스키가 벌이는 좌충우돌의 나열에 그치는 책. 사용하는 단어조차 신사 숙녀들이 즐기기에는 은어, 비어, 속어, 그리고 정상적인 단어이기는 하지만 의례상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것들이 그냥 일상다반사처럼 나열된다. 스스로 숙녀, 신사로 자칭하시는 분, 말로는 안 하지만 그런 계급에 속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사시는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마시라. 인간은 뭔가를 하루에 세 번씩 입을 통해 소화기관으로 집어넣어야 하고, 섭취한 양과, 근육과 뼈의 운동량과 연관관계를 갖고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몸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포유류임을 아는 인종들만이 즐길 수 있는 책. 행크는 일자리를 얻거나, 해고를 당하든지 스스로 그만 두든지 하거나, 섹스를 하거나, 말러의 교향곡이 흐르는 가운데 거구의 창녀로부터 억지로 섹스를 당하거나, 궤양이 생길 때까지 알코올을 섭취할 때, 구접스럽게 이것저것 재고 가리고 계산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사회부적응 형 인간. 그러나 이 인간을 바라보는 초점을 약간 달리하면, 불행하게도 20세기를 살아야 했던 천의무봉한 기인이랄 수 있을 것. 그러니 <팩토텀>을 읽는 일이 문명세계에 불시착한 싯다르타를 구경하는 것이란 주장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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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8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가 부코스키 작품 중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인데요, 으악 ㅋㅋㅋ 읽고나선 으악! 찰스 부코스키 책 다시는 안 읽어! 했더랍죠. 근데 신기하게도 그 뒤로 나오는 족족 다 사봤어요;;; 나참 ㅋㅋㅋㅋㅋ 이젠 왜 부코스키 추종자들이 있는지 이해할 정도랄까요.

Falstaff 2019-04-18 11: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사람은 극적으로 호오가 갈리는 거 같더라고요. 제 주변에도 딱 절반은 열광, 절반은 극혐이고요. ^^ 하여튼 뭔가가 극적인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