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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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가 이륙을 감행할 때, “손가락은(그리고 발가락은) 얼음장으로 변하고 위는 흉곽 사이로 뛰어오르고 코끝 온도는 손끝 온도와 똑같이 급강하하고 젖꼭지는 브래지어 속에서(이 경우엔 드레스 속에서라고 해야 옳으리라.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으니까)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고, 짧은 굉음의 순간, 나의 심장과 기체의 엔진이 힘을 합쳐 공기 역학의 법칙이 결코 허망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그게 허망한 미신이란 걸 가슴속 깊이 알고”(16쪽)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공포. 이것이 책의 제목 ‘비행공포’의 정체다. 교대역 바로 옆에서 농사를 짓다가 끝까지 땅을 팔지 않아 벼락부자가 된 이모부도 이놈의 비행공포 때문에 넘쳐흐르는 현금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 한 번 못 갔다. 그래 어떤 증세인지 안다. 어쨌건, 중국계 미국인이자 정신과 전문의 베넷 웡의 유대인 아내 이사도라 젤다 웡이 일인칭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며, 이제 부부동반으로 천재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 이륙하는 순간 소설은 시작한다. 작가 에리카 종이 중국계 미국인 정신과 전문의 아랑 종의 법적 아내 에리카 ‘종’이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독자가 꼭 이 책을 작가의 자전적 서술이라 단정할 필요는 없다.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지 않는 작가가 별로 없지만 오직 자신의 경우만 가지고 작품을 쓰는 소설가는 더욱 없을 것이니까. 나는 그냥 페미니즘 소설, 그것도 초기 페미니즘 소설로 읽었다. ‘초기’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에서는 21세기가 열리면서야 이브 엔슬러의 희곡에 의한 연극 제목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부산에서 열린 페미니즘 축제, “버자이너 페스티벌” 등으로 표현이 가능했던 단어가 아주 우습게 등장한다. 속어도, 비어도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날 것으로 그냥 꺼내 쓰기에는 쑥스럽다고 여기는 단어. 나도 굳이 독후감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겠다. 여성이 자신의 외음부를 총칭하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쓰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도 이제 여성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 소설들과 비교를 해보면(굳이 비교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읽으면서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대한민국 페미니즘 소설 다수에서는 집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밖에선 성폭력에 가차 없이 유린당하는 여성이 나타나는 반면, 이 소설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① 주인공 이사도라를 약 한 달 동안 성적 파트너로 이용하는 남성과 ② 밤기차 안에서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남자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페미 작품과 비교하면 이도 나지 않은 정도.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73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권리가 충분히 확장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없었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작가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장 큰 것이 경제적 종속이고 그 다음이 아직 변하지 않은 사회적 가치관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사도라 웡은 시집을 한 권 낸 등단시인이며, 대학에서 간간히 강의도 하면서 잡지에 기고도 한다. 정신분석 학회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전문의의 부인이란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학회를 취재하여 기사로 내기 위해서였다. 수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50분에 40달러를 내고 정기적으로 정신분석을 받는 돈은 거의 전부 남편이 충당해왔다. 진료비로 1970년대 초반 기준 일 년에 수천달러라는 돈은 시집의 인세와 쥐꼬리만 한 강의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거다. 여기에 이사도라의 유대인 가족 문화도 한 자리 한다. 언니 랜디는 본인이 유대인이면서 아랍인과 결혼해 모로코에 살며 언제나 임신 중이거나 수유중인 상태로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다른 인종과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때까지의 사회 규범인 결혼과 자녀 양육을 당연한 것으로 따르고 있다. 결혼과 이에 따르는 출산, 수유, 육아, 그리고 하우스키핑은 당연히 여자와 여자의 일과 여자의 독립과 여자의 발전에 극적인 장애물로 기능할 것으로, 아직 두 번밖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이런 사회적 보편가치는 임신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이사도라를 수시로 압박하고 있는 것.
 웡 부부가 빈에 도착해 학회에 참석하면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영국 출신의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프로이트 학회의 폐막 연설을 할 정도로 이름은 낸 의사인데, 현재 아내와 별거 중으로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않되 각기 타인의 사생활엔 간섭하지 않고 살기로 약정을 맺었다는 인간이다. 이사도라가 학회 취재를 위한 행사장 입장을 두고 관련자와 다투고 있을 때 이를 유심히 바라보다 그날로 이사도라의 엉덩이를 양 손으로 꽉 쥐어 잡는 인물. 잘 생기고 자연스러운 복장에 더러운 발가락이 드러나는 샌들을 신은 영국인에게 엉덩이가 한 아름 쥐어 잡히자 이사도라는 단박에 놀라운 감흥으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것. 이 장면이 불쾌했다. 잘 생기고(돈 많고) 키 큰 남자는 만만해 보이는 여자의 엉덩이를 더듬어도, 더듬는 정도를 넘어 꽉 쥐어도 죄가 안 되는 컷. 저 뒤로 가면 친절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가 여자를 (지극히 간단한 접촉으로)밀어 뒤로 눕히는 건 절대 안 되는 컷. 그러나 그만 한다. 처음 본 남자에게 엉덩이가 잡히자 곧바로 성적 감흥이 오게 만들기 위해 작가는 첫 장章의 제목을 “꿈의 학회 또는 ‘지퍼 터지는 섹스Zipless Fuck’로 가는 길”이라 해놓고 처음 본 외판원이나 배추장수, 우체부와 섹스를 꿈꾸었다고 장치를 해둔 터이다. 친절하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던 ‘지퍼 터지는 섹스’는 이미 환상이 다 깬 상태였으니까. 섹스는 섹스이되 지퍼 터지는 섹스조차 상대를 가려서 가능한 법. 기준은? 기준 말고, 문제는 권력이다, 권력. 돈과 지위와 전망과 학식과 위트가 있는 별거남이 한낱 친절하기만 한 열차 검표원하고 같아? 하여간 갑자기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된 이사도라. 어떻게 될까? 말 없고 진지하고 틀에 꽉 짜인 듯 빈틈없으면서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몇 번의 불륜을 저지른 것은 잠시 동안의 일탈로 여기는(아, 남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같은 건 절대 이사도라와 에리카 종의 관심사가 아니다) 웡 박사를 좇아 안정된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자신의 욕망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따라 에이드리언을 따라 내일 따위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며 유럽 전역을 유랑할 것인가. 답은 가르쳐 드린다. 이사도라는 당연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열정을 좇는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이라는 사내와 좋은 결말을 지으면 페미니즘 소설이 될 자격이 없겠지? 그렇겠지? 신뢰할 만한 남자가 여러 명 등장하면 여성주의 소설로는 안 될 터이니. 여기까지는 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럼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사도라는 무소의 뿔처럼 고개를 발딱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자, 1973년에 초판이 나온 작품임을 감안하시고, 직접 읽어서 확인하시라. 이사도라가 에이드리언을 따라 그의 고물 승용차에 오를 때, 이사도라의 핸드백 속엔 현재 호적상 남편 베넷 웡의 통장과 연계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와 여행자 수표책이 있었다는 거.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시대가 1970년대 초니까.

 이 시대에 페미니즘 소설에 관해 독후감, 즉 감상문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다. 진정한 페미니스트께선 이 감상문을 읽고 허튼 소리라고 크게 화 낼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용서하시라. 에리카 종도 작품 속에서 나 같은 남자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써 놓았으니.


 "실제로 문학을 좋아하는 남자는 종종 개자식으로 판명되곤 한다. 아니면 한심한 놈이거나."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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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6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70년대는 몰라도 지금 읽기에는 그리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당시로서는 놀라웠을 것 같지만 지금 읽기엔 글쎄요... 지퍼 터지는 섹스 및, 여성의 성기를 시도때도 없이 자연스럽게 언급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여성 해방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암튼 이 책은 뭐랄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었던 느낌이었습니다...

Falstaff 2019-04-16 10:42   좋아요 1 | URL
옙. 마지막 장면이 실망이었거든요. 1970년대 당시 기준으로도 페미 소설을 빙자한 그냥 대중 소설 같았습니다. 대중 소설이나 장르 소설을 무시하지 않는데, 대의를 빙자한 건 좋아할 수 없어요.
저도 에리카 종은 쫑 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