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밀알 - 개정판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5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피의 꽃잎들>, <십자가 위의 악마>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시옹오의 작품. 내용으로 보아 <한 톨의 밀알>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먼저 읽은 두 장편은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 정치적으로 완전하지는 못할지언정 해방을 맞았으나, 경제·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영국의 예속 하에 머무는 반半식민 상태 신생독립국에서 자행되는 초보국가 특유의 부패와 독재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한 톨의 밀알>은 1963년 12월 12일, 바야흐로 독립, 토속어로 ‘우후루’를 쟁취한 날 앞뒤로 며칠 동안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책의 상당한 부분을 프래시백, 회상을 통한 식민 통치하 농민 반란군이자 독립군인 마우마우 단團에 속했던 젊은이 세 명, 키히카, 기코뇨, 카란자, 그리고 그저 평범한 청년 농군이었다가 수용소에서 폭행당하는 임신한 여성을 도와주는 바람에 곤욕을 치러 지역의 영웅이 된 인물 무고의 행위를 회상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16세기에 시작된 유럽인들 간의 침탈 전쟁 끝에 1895년부터 68년에 걸친 영국에 의한 식민통치를 경험한 케냐. 이후 신생독립국의 치명적인 함정인 독재와 부패, 거기다가 아프리카 특유의 종족 간 갈등과 자연재해 등으로 40여 년을 시달리며 오늘에 이른다. 한 국가 또는 국민이 ‘민족주의’를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단계는 식민 또는 반半식민 상태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때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중반까지 여전한 반半식민 상태, 또는 독재자와 매판 자본가들에 의해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었고 그건 한편으로 정당했다. 물론 이런 상태에서 상당부분 벗어난 지금도 여전히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건 난센스이자 자주 파렴치한 일일 터이지만.
 그리하여 이 책 <한 톨의 밀알>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다. 회상 장면은 마우마우가 활약하던 5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 행동 대원이자 현재 기코뇨의 아내 뭄비의 오빠였던 키히카가 백인 경찰서장 토마스 롭슨을 권총 두발로 암살해버리고 숲으로 도망친 일을 시작점으로 한다. 책의 후반부에 키히카가 어떤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하는지 자세하게 묘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키히카와 마우마우단을 배반하여 영웅 키히카를 식민당국에 고발해 교수형을 당하게 만들었는지, 이제 다시 63년 남반구의 여름, 보슬비가 내리려 하는 12월 12일을 무대로 배신자를 처벌하려 한다.
 이 정도 이야기해도 스포일러까지는 되지 않을 것. 기코뇨와 카란자 둘은 키히카의 여동생 뭄비를 연모하고 있었다. 어느 날 쇠뱀, 즉 기차를 구경하기 위해 정거장까지 케냐의 자랑거리인 장거리 경주를 했는데 정거장까지 뛰어 도착한 선수는 카란자 한 명. 나머지 둘은 그 시간 동안 숲 속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나중에 부부가 된다. 경찰서장 암살 사건 이후 목수 기코뇨는 마우마우 단원으로 의심받아 6년에 걸쳐 수용소로 보내지고 촌락도 백인과 백인에 고용된 동족에 의하여 불에 홀랑 타버려 터를 옮겨 새로 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와중에 기코뇨의 땅은 당국에 접수되어 먹고 살 일이 까마득한 상태. 이럴 때 카란자는 배를 바꿔 타고 자신이 마우마우 단원이었음을 고백하고 백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끝에 흑인으로선 높은 수준의 경찰권을 확보하게 되면서 간혹 뭄비와 시어머니한테 먹을거리를 던져주고는 했다. 4년가량이 지나 기코뇨의 석방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줄 당시 뭄비는 카란자의 아이를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고, 아이가 아직 젖을 떼지 못했을 즈음 드디어 기코뇨가 집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의 스토리는 밝힐 수 없다.
 앞에 읽었던 시옹오의 두 장편소설과는 다른 시기를 선택해 작품을 만든 만큼, 신생독립국의 국민으로, 식민모국의 지배자가 아닌 피부색이 같은 동족에 의한 압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독립 케냐의 적장자 시옹오는 과거의 케냐를 통치했던 백인들은 에누리 없이 악마, 흡혈귀로 표현하는데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백인들보다 더 미울 수 있는 인간들이 그들에 밀착해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배신자일 것이다. 몇 명의 배신자 그룹을 만드는 것까지는 그냥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정성과 비극성의 조화”라는 제목의 옮긴이 말에 의하면 이야기의 구조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서구인의 눈으로>와 유사하다고 하는데, 그런 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고, 내가 느낀 아쉬운 점은 시옹오가 멋을 과하게 부리느라 (이해 안 될 건 없지만)자신의 평화로운 삶에만 집착하는 한 인간에게 맥베스의 관을 입히고 그의 용기에 은연히 갈채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 명백한 배신자이자 경찰력을 이용해 동족의 처형을 숱하게 저질러온 카란자의 청산을 미루어두었다는 것 등이다. 여기서 생각이 삐끗해서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더 보탠다면 치명적 스포일러가 될 것이라 더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 아무리 근 70년 동안 식민 상태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배신은 배신일 뿐이다. 작은 배신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은 비록 대중이나 법에 의한 처벌은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아픈 반성과 자책이라도 뒤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케냐나 대한민국이나 식민 통치를 경험했던 민족은 다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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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7-2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옹오의 작품은 이 작품으로 시작하는게 좋군요!

Falstaff 2019-07-25 09:16   좋아요 1 | URL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십자가 위의 악마>는 김지하의 <오적>에 영향을 받은 것 같고요, 그래서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원주 시내엔 시옹오 사진이 막 붙고 현수막도 날리고 그랬다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