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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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오후에 읽고, 집에 가서 독후감을 써야지, 했다가 술친구들한테 납치당해 각자 소주 두 병, 연태 고량주 500cc 짜리 한 병씩 마시고 좀비 됐다. 어제 오전엔 당일배송 시킨 쥐포 구워 맥주 500cc 마시면서 유료 TV로 <극한직업> 두 번 보고, 마누라 점심 약속 있다고 나간 사이 해장으로 또 소주 한 병 깠다. 암만해도 알코올 의존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거 같다. 그거 아시는가,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사람 스스로도 술을 안 마시고 싶어 한다는 슬픈 진실. 근데 그게 안 된다. <극한직업> 두 번째 보니 처음 볼 때보다 디테일한 장면들을 더 잘 볼 수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다. 코미디 우습게 아는 분들 보면 참 존경스럽다. 난 코미디 좋아하는데, 진정한 코미디 속에는 진정한 슬픔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구치 가방에다 고액권을 채워 아내에게 건네준 마포서 마약반 고반장. 깜짝 놀란 아내 김지영이 갑자기 (짧은)머리를 휙 풀어헤치며, 나 씻고 올게, 라고 허리가 부러지게 웃기지만 세상에서 보답이라고 그거 하나밖에 없는 슬픈 대사를 하더라.
 근데 내가 지금 <관객모독>의 독후감을 쓰는 거야, 아니면 내 독후감을 구경하러 오신 분들을 모독하기 위해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거야.
 희곡 <관객모독>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대사로 되어 있다. 1978년에 우리나라 초연 당시 일종의 신드롬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 걸로 아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내 친구 가운데 (잘 생긴)하나가 좀 이상한 성격이라서 연극의 마지막에 관객들을 향해 확 물을 끼얹는 장면이 있다고 했던가, 욕을 한 바가지 했다고 하던가, 하여간 이런 변태 짓에 홀딱 빠져버렸던 기억이 있다. 내 친구가 미친놈이지, 물바가지 세례를 받고 욕을 얻어듣는 것이 좋아? 그것도 천금 같은 내 돈 내고 즐기려고 간 연극에서? 어쨌거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연극을 보지 않았다. (극)작가 페터 한트케도 20세기 중후반 독일 문학 판에서 실험적 소설, 희곡 등을 꾸준하게 발표한, 조금 골이 저린 인물이라 작품을 그리 즐겨 읽지는 않아왔다. 즉, 찾아서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
 하여간 이제, 늦게라도 희곡 <관객모독>을 읽어보니, 우리나라에서 관객을 향해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쏟아 붓는 건 원작 속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대단한 연출가가 제대로 한국의 관객들을 모독하기 위한 방식을 생각해낸 것이다. 조금씩 도가 심해지다가 마지막 근처로 가면 아예 상스러운 욕설을 해댄다고 하는 것도, 원작에선 그것도 그리 험하지 않은 욕지거리로 되어 있다. 역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세상살이가 험해지는 모양이다. 1960년대 식 욕설은 이제 거의 겸양의 언사로 여길 수준이라서?
 희곡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로, 연극을 공연할 배우들에게 극작가 페터 한트케가 만든, “배우들을 위한 규칙들.”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다. 그러니 함께 몇 가지만 읽어보자.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번갈아 올리는 기도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축구장에서 외쳐대는 응원 소리와 야유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데모하는 군중들의 구호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안장이 땅을 향해 거꾸로 세워진 자전거에서 돌아가는 바퀴살이 조용해질 때까지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멈추어 설 때까지 바퀴살을 자세히 관찰할 것.
 (중략)
 롤링 스톤스가 부르는 「텔 미」란 노래를 귀 기울여 들을 것.
 기차들이 동시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중략)
 비틀스 영화들을 자세히 관찰할 것.
 최초의 비틀스 영화에서 링고 스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한 후 드럼 앞에 앉아 드럼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미소를 자세히 관찰할 것.
 「서부에서 온 사나이」라는 영화에서 게리 쿠퍼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것.
 위의 영화에서 몸에 총을 맞고 폐허가 된 도시의 황량한 거리를 절뚝거리며 한참을 달려가다 쓰러지면서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벙어리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할 것.
 (후략)

 

롤링 스톤스, <텔 미>


 그러니 이 드라마를 공연할 네 명의 배우는 몇날 며칠에 걸쳐 이런 모든 행위를 경험한 다음에야 대본을 외우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한, 배우들을 위한 규칙이다. 무대에는 딱딱한 나무 의자 네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하다못해 조명도 무대와 객석이 같은 조도로 되어 있다. 무대 위의 네 명의 배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지시사항도 없이 길고 긴 대사를 각기 적당히 나누어 얘기하라고 할 뿐. 근데 대사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봐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읽어봐도 뭐 그저 그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연출에 따라서는 그냥 지나가는 듯이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즐겁게 흥얼거리게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적혀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배우들을 위한 규칙이 팍 떠오르더라. 세상의 모든 소리와 모습 그대로, 배우와 관객의 경계도 없이 그냥 떠들어대는 거다.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의 장르가 해체되는 순간.


 여러분은 여기서 환영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연극은 이렇게 끝난다. 관객은 정말 끝났는지 아닌지 멍해 있는데, 스피커를 통해 우레와 같은 갈채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정말 연극이 끝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연극의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로 보면 될 일. 무슨 큰 일, 기가 막힌 전기 등으로 꾸밀 필요도, 찬양할 이유도 없다. 관객들은 연극 <관객모독>을 보고 즐기거나, 재미있다고 말하거나, 충격적인데, 라고 놀라는 척하거나, 연극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구변극을 개척하는 작품이라고 아는 척을 하면 되는 거다. 심지어 물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서 거 참 시원하다, 감탄을 해도 무방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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