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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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우리나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우루과이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으로 언론인 겸 시인, 소설가라고 한다. 책 뒤에 실린 역자의 작품해설을 보면, “베네데띠는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바르가스 요사, 까를로스 푸엔떼스 같은 붐 소설가들에 대해 ‘그들은 보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계급을 대변하며,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보통 사람들을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단다. 여러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문장. 마르케스, 요사, 푸엔테스로 대표하는 아몰랑주의 문학, 즉 ‘붐 소설’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보편계급이 향유하는 문화에 접근하긴 하는데, 성분이 ‘특권계급’이라서 진정한 보통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뜻. 실제로 요사의 경우엔 정도가 좀 약하기는 하지만, 마르케스나 푸엔테스, 심지어 이들의 15년 정도 후배인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소위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적인 요소가 베네데띠의 <휴전>에선 완전히 제거됐다. 비록 보통사람들의 문학을 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이들의 계급이 상류, 적어도 인텔리 계급이라 “진정한 보통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는 한다. 작가 마리오 베네데띠는 집안이 어려워져 14세 때부터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하며 문학청년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책의 앞날개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이 책 <휴전>을 발표한 1959년까지는 경제적으로 “진정한 보통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산 것 같다.
 이 책 초간본이 나온 것이 1960년,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 195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였다. 1877년생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인가에서 보면 나이 서른에 달하니 이제 자신에게서 청춘이 물러갔다고 선언한 바 있다. 서양인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아직 젊은 나이의 마리오 베네데띠는 책상 위 원고에서 스스로 나이를 스무 살이나 위로 올려버린다. 자신이 젊어서 일을 해봤던 자동차 부품회사의 회계사무실의 한 고참 부장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스스로 나이를 올렸건 나이 많은 고참 직원을 모델로 했건 그건 작가의 자유니까 좋은데, 이 놀라운 스물아홉 살 청년 베네데띠는 정년퇴직을 6개월 28일 남긴 늙은 직원의 심리상태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해놓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도 낼 모레가 정년이니까 알지.
 1950년대 말의 우루과이. 당시엔 법정 정년이 만 50세였다고 책의 주석에 적혀있다. 그러니 주인공이자 마흔아홉 살의 홀아비 마르띤 산또메가 이제 ‘겨우’ 마흔아홉의 나이로 죽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흉볼 건 없다. 당시 세계의 평균수명을 보면 상당한 노년이었음 직하니까. 책은 21세기 현재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작은 규모의 팀장 정도를 수행하는 마르띤 산또메의 일기로 이루어졌다. 20년 전에 먼저 간 아내 이사벨과의 사이에 맏아들 에스떼반이 있고, 가운덴 딸 블랑까. 그 아래로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하이메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가족에게 커밍아웃하고 집을 나가버린다. 에스떼반은 줄을 탔는지 뇌물을 줬는지 하여간 낙하산을 타고 보통의 우루과이 사람들이 보기엔 높은 자리의 공무원으로 있다. 머리통이 다 굵은 두 아들과 딸 하나와 삐걱거리는 가정생활. 산또메 씨가 잘못 생각한 거다. 딸은 당시 규범으로 집에서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제 밥벌이 하는 아들 둘은 잽싸게 내쳐 독립을 시켰어야지. 새도 새끼들이 웬만큼 자라면 서둘러 날갯짓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향해 처녀비행을 시키지 않던가. 이를 ‘삭비數飛’라 하지 아마.
 산또메 씨의 일기에 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자동차 부품회사 경리부라는 보통사람들의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화들. 사장 딸과 연애하며 승승장구하는 직원 수아레스. “몇몇 사업가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직원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사회 최고참 임원, 수아레스에게 승진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틈날 때마다 그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고참 직원 등등. 이들이 벌이는 나름대로 귀여운 계교와 수작들 역시 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또메 씨의 학창 시절 친교를 나누었던 동창들 역시 작지 않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일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스물네 살의 신입사원 라우라 아베야네다 양과의 연애 이야기다.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다섯. 입사하고 한 보름쯤 일기엔 “날 부를 때면 언제나 눈을 깜박거린다. 미인은 아니다. 뭐, 웃는 모습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게 어딘가.”하며 좀 시니컬하게 적어놓았다. 그 후 약 한 달이 지난 4월 10일에는 “아베야네다에겐 어딘가 끌리는 데가 있다. 확실하다. 대체 그게 뭘까?”로 한 계단 올라서더니 또 한 달쯤 뒤엔 한 카페에서 라우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라고 고백을 해버리는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라우라가 화답하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스물네 살의 처녀virgin가 자기보다 스물다섯 살 위의 아버지뻘 남자에게 연정을 느끼는데, 늙은 ‘나’ 산또메 씨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를 계속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불확실한 미래? 10년 후가 되면 자신은 60, 라우라는 여자로서 최전성기인 30대 중반을 맞아야 하는 불균형? 혹시 미래의 어느 날 라우라가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를 찾아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 또는 불안? 이들은 과연 나이 차이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세 자식들의 축복 아래 행복하거나 아니면 행복 비슷한 결혼의 문으로 입장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이건 가르쳐드릴 수 없다.
 반듯하지만 우울하고 기본적으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은퇴예정자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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