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마이링크가 1913년에서 14년까지 잡지에 연재한 것을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독일에서 출간하여 2년 만에 25만 부가 팔린 놀랄만한 기적을 이룬 책이다. 책 뒤에 보면, 이때 마이링크가 살림이 곤란해서 인세를 받는 대신 그냥 판권 자체를 팔아넘겨 자신은 별로 돈을 만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쩌랴 그게 인생인 걸.
 책을 읽다가 첫 부분부터 고딕 소설의 양식을 띤 초현실주의 문학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고딕 소설은 당시 에드가 앨런 포와 메리 셸리,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같은 것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골렘>이 나오고 2년 후에나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하여 주창이 되고, 출간 후 거의 10년이 지나 1924년에 앙드레 부르통에 의해 전성기를 맞을 초현실주의의 면면이 보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서 잠깐. 이 작품에 관해 누구도 초현실주의 운운하지 않는다. 완벽한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내가 읽어보니 그 사조의 기미가 보인다는 뜻이다. 게다가 구스타프 마이링크 자신이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국무대신 폰 파른뵐러 남작과 궁정극장 여배우인 유대인 처녀 마리아 마이어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나 (427쪽) 고독한 소년기를 지내고, 이후 청년기가 되어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다가 20대 초반에 권총자살을 결행하려는 순간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적은 ‘찌라시’ 한 장 때문에 자살을 포기하고 마법, 신비주의, 연금술, 카바라, 요가, 도교, 불교 등등에 몰두하기 시작했단다. 잘 했다.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말은 이리 쉽게 해도 생각해보시라, 이런 아들을 둔 부모 마음을. 그러나 걱정도 팔자. 아버지는 끝내 마이링크가 자신의 후손임을 부정했고, 어머니 역시 오직 하나, 배우로서의 자신의 경력에만 관심을 두었다니. 이런 성장과정의 특이점이 모이고 모여서 그의 나이 마흔일곱에 유대 산 괴물 하나에 집중되었으니 이름하여, 골렘.
 ‘골렘’하면 사실 이름이 낯설지 않다. 골룸 때문에. 난 <반지의 제왕>에서 등장하는 골룸보다 조혜련의 골룸을 훨씬 재미나게 생각하는 인간인데, 하여간 이미지는 비슷하다. 골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7세기, 그러니까 1600년대 유대 랍비가 만들어낸 작은 프랑켄슈타인 정도로, 아랫니 안쪽에 부적을 붙여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였단다. 그런데 간혹 랍비가 깜빡 잊고 부적을 떼지 않는 밤이 혹시라도 있을 거 아닌가. 이럴 땐 만월이 비추고, 만월을 바라보고 있던 어떤 인간의 송곳니가 솟으면서 하울링을 시작하는 늑대인간으로 변신할 때, 골렘은 창백한 시선과 괴물 같은 모습으로 동네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깽판을 쳤던 것이란다. 그래 유대 랍비는 이 골렘이란 유사 괴물을 출입구가 없고 오직 작은 창문 하나만 달린 높은 탑 위에다 유폐를 시켜버렸는데, 거기서 아랫니에 부적을 달지 않은 상태로 백년이고 천년이고 흘러갔다면 당연히 소설이 성립되지 않으니, 구스타프 마이링크는 33년에 한 번씩 프라하의 유대인 거리, 즉 게토 지역에서 이 골렘이 나타나고, 그때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고, 그런 민간전승이 있다고 밑밥을 깔고 소설을 시작한다.
 앞에서 마이링크가 동양의 신비사상에 빠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초입에 불교적 화두를 하나 던진다.


 “까마귀 한 마리가 비곗덩어리처럼 생긴 돌멩이를 향해 날아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저기에 맛있는 게 있을지 몰라.’ 그렇지만 까마귀는 거기서 맛있는 거라곤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날아갔다. 그 돌멩이를 향해서 다가갔던 까마귀처럼 우리 유혹자들은 금욕적인 부처를 그냥 버려두고 떠나간다. 그에게 더 이상 애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8쪽)


 방금 책장을 덮은 내가 다시 읽어봐도 이 화두를 완전히 풀지는 못하겠다. 화자 ‘나’는 불면에 시달리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 의식의 저 안쪽에서 비곗덩어리를 닮은 돌멩이를 열나게 찾는데, 그건 책의 거의 끝부분인 388쪽이 되어야 앗, 하는 순간에 겨우 나온다. 그러니 가르쳐드리지 못하지. 그게 결론인 걸. 그냥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말만 하자. ‘나’는 오래 전에 어디서 실수로 다른 사람의 모자를 내 것인 줄 알고 썼던 기억이 있다. 하필이면 그 모자가 내 머리에 잘 맞아 집에 도착해 모자 안쪽을 들여다 본 후에야 남의 모자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이 쓰던 모자는 머리카락이 닿는 안쪽에 비단으로 안감을 대고, 안감에 모자의 주인 이름을 대개 황금색 실을 써서 재봉틀로 들들 박아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19세기 생인 내 조부님도 그런 모자를 쓰고 다녀서 안다. 거기엔 “아타나시우스 페르나트”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화면의 전환이 발생한다. ‘나’와 ‘아타나시우스 페르나트’의 혼동이 발생하는 것. 그래 한 순간 ‘나’는 예술가 수준의 보석 세공인 페르나트가 되어 유대인 언청이 고물상 주인 ‘바서트룸’을 중심으로 장편소설이 되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한 얘기 한 번 더. 이야기는 약 일 년의 구치소 생활을 제외하고는 프라하 내 게토지역에서 벌어진다. 게토라는 것이 반유대주의의 한 표징으로 유대인들(만)이 모여 살라고 집단 거주지로 만들어 놓은 곳이기 때문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골목이 좁고, 길은 진흙탕 등등 그리 밝은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책 뒤표지에 쓰여 있듯이 골렘은 ‘게토 지역에 감도는 어두운 집단적 심리 상태’일 수도 있고, 비밀의 문을 통해 출입구 없이 창문만 하나 나있는 탑 위의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나’의 의식의 저편 또는 도플갱어일 수도 있다. 안다, 알아. 지금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지? 이해해주시라. 내 의견이 틀리겠지만, 하여간 초현실주의와 근접한 자리에 있는 고딕 소설을 어떻게 콕 짚어서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한낱 아마추어가 말이다. 만일 앞으로 이 책을 읽으실 분이 계시다면, 바라옵건데 비곗덩어리를 닮은 돌멩이를 찾는 건 물론이고, 금욕적인 부처를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는 일이 없으시기 바란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담되셔? 그럼 다행이네. 이 책, 지금 ‘절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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