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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지금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보면 책꽂이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대표작 <부영사副領事>가 보인다. 지금도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민음사 이데아 총서 시리즈 열일곱 번째 책으로 1984년 초판본이다. 당연히 금속활자로 찍었으며 모든 페이지의 변두리 부분 종이 색이 갈색으로 변해있다. 이 책의 역자가 최현무崔賢茂. 필명이 최윤. 이이는 서강대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엑상프로방스(여기 동문이 아마 김화영, 김치수 등일 걸?)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구로 박사 취득, 귀국 후 우리나라에 뒤라스를 본격 소개한 1세대 비슷한 인물이다. <부영사>가 나오고 2년 후, 현 이대 명예교수 김인환이 문학사상사에서 단편집 『복도에 앉은 남자』를 번역해 출간했는데, 책 속에 <애인>이란 좀 긴 단편이 들어 있다. 이 <애인>은 1992년, 제인 마치와 양가휘 주연의 영화가 <연인>이란 제목으로 히트를 치자 이후 제목을 <연인>이라 바꾸어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된다. 말이 길어졌다. 최윤이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전공한 작가이고 그래서 이 책 <오릭맨스티>를 읽어보면 뒤라스도 속해 ‘있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 누보로망 계열의 문법, 문장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윤의 책은 나도 사실 이번이 네 번째 읽은 것에 불과하며, 최근에 읽은 <겨울 아틀란티스>도 벌써 20년 전 이야기라, 이이의 작풍作風이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또한 그걸 확인하기 위해 지금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생각도 없고. 하여간 내가 평소에 최윤을 상당히 높게 평가해왔던 것에 비하면 의외로 적은 작품만 읽은 건 사실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그동안 먹고 사느라 여유가 없었다는 핑계를 대야할 것 같다. 빵은 언제나 예술보다 앞서니까.
<오릭맨스티>는 짧은 장편이다. 누보로망 비슷한 작품을 만일 500쪽을 넘게 장편으로 만든다면 그걸 쉽게 읽어낼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짧고 건조한 문장. 대화의 부재. 서걱대는 남자와 여자가 별 의미 없이 연이 맺어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그래도 긴 시간을 묘사한다. 이름도 주어지지 않은 그냥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애틋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어영부영 결혼에 이르게 되는 많은 커플의 한 정형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말 시점. 그냥 소개로 만나 별 의미 없는 미지근한 데이트를 하다, 결혼이나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났다는 공통점 하나 가지고 덜컥 맺어진 이들. 작가는 처음에 그냥 ‘남자’와 ‘여자’ 이렇게 소개팅을 한 커플을 만들어놓고, 이들의 연애 비슷한 걸 무작정 따라가면서 관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반 지하 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남자는 회삿돈을 야금야금 삥땅하기 시작하고, 여자는 한 번의 임신중절을 하고, 투 잡(two job)을 하며 돈 모으는 재미에 각종 금융권에 관심을 두고, 남자는 출장길을 이용해 일 년에 서너 번 여자를 사고, 여자는 주식 투자 중에 전직 은행원이었다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며 가용자산 총액의 절반을 사기당하고, 삼대독자 아들을 낳았는데 이게 남편의 아이인지 전직 은행원이었다는 사기꾼의 아이인지 도대체 구분을 못한 채, 지방 소도시에서 살던 시어머니를 불러 아이 양육을 부탁하다가, 기어이 작은 아파트 하나를 사 이사를 가고, 생애 첫 번째의 거창한 부부동반 휴가 도중에 사고를 당한다.
물론 이것이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더 이상의 스토리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전적으로 아마추어인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 두 주인공에게 특별한 사건, 휴가 중 사고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스토리를 만들고, 그것을 엮어나가는 일은 전적으로 작가의 권리다. 그걸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그냥 별 의미 없이 사는 한 부부의, ‘의미 없는 삶을 산다는 의미’에 대하여만 건조하게 조망해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일 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앞부분에서는 모래알 같은 문장들로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나 의도를 짚어내는 것에 관심이 갔으나, 휴가 중 사고부터는 어째 좀 무리하게 스토리를 이어나가지 않나 싶은 것이, 앞에서 공들여 만들어나갔던 특유의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는 말을 이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