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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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강>에 이어 두 번째 읽은 엔도 슈사쿠. 가톨릭 신자로 평생 종교적 사색에 깊이 잠겼다는 건, 나 같은 유물론자로 하여금 작가와 작품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효과적인 광고방법이다. <깊은 강>에도 물론 종교적 사유가 깊게 밴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쓸쓸한 갖가지 삶의 여정을 차분히 써내려가서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다. ‘갖가지 삶의 여정’이라고 하면 그건 개별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뜻. 행복한 사람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니까. 하여간 <깊은 강>을 읽고 나서,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기억해놓았다가, 창비 세계문학에서 이이의 다른 작품을 간행한 걸 알자마자 곧바로 보관함에 넣었다가 이제야 읽었다.
 패전 후 재건에 나선 일본. 수요가 많았던 못 도매상에서 일하는 평범한 봉급쟁이 화자 ‘나’는 비싸지 않은 집을 찾아 아직 도로포장을 하지 않아 차가 지날 때마다 풀썩 풀썩 먼지투성이가 되는 도쿄 외곽지대의 작은 주택가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내과 의사, 양복점 주인, 주유소 사장 기타 등등. ‘나’도 역시 중국 침공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을 했지만 당시가 전쟁의 막바지여서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퇴역을 한 처지. ‘나’는 화물차가 달릴 때마다 고운 황토 먼지가 간판이며, 창틀이며, 사람들 콧구멍이며, 눈썹에까지 뽀얗게 앉아버리는 변두리 길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보면 불과 몇 년 전엔 중국여인들을 윤간하고 중국 남자들을 기둥에 묶어놓은 채 돌격 연습을 했거나(주유소 사장), 남경 사변의 주인공인 헌병 출신으로 학살의 중요한 일원이었다(양복점 주인). 그들이 악인이어서? 아니, 아니. 지금 이이들이 도쿄 변두리에서 그냥 보통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듯이 전쟁 전에도 보통의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세월, 특히 전쟁과 학살과 고문과 윤간의 독약에 취해 자신들이 저지르려 하는 짓이 최악의 범죄인줄 알면서도 그냥 저질러버리게 되던 거였다.
 이들 가운데 아리송한 인물. 내과 의사 스구로. ‘나’는 허파 기흉氣胸으로 흉부내과에서 정기적으로 공기(산소)를 주입하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 만성 질환자. 이상하지? 흉막에 공기가 차서 폐에 압박을 주는 기흉 환자에게, 주사를 통해 공기(산소)를 넣어주면 폐가 더 찌그러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검색해봤다. 그래야 한단다. 의학 지식을 설명할 만큼 소양이 없는 관계로 이유는 생략. 하여간 도쿄에 살 때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내과 의사가 맞았지만, 변두리에선 병원이라고는 스구로 의사가 운영하는 내과병원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이이에게 흉막 안을 주사하는 처치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나’는 이게 결코 즐겁지 않다. 불친절할뿐더러 흰 가운gown에 작고 검붉은 핏자국이 하나 찍혀 있는 것이 영 께름칙하고, 두꺼운 손가락의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맣게 끼어 있는 것도 모자라, 주사바늘을 삽입하기 위해 늑골 사이를 더듬는 손길이 싸늘하니 매우 불길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주유소 사장 말에 의하면 솜씨도 괜찮은데다가 돈 없는 시골 농부들한테 무료로 진료도 해주고 약도 지어주며, 심지어 자신한테도 작년에 진료한 비용을 아직까지 청구하지 않은 호인이란다. 물론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도쿄에서도 유명한 의사한테 주사 처치도 많이 받아봤지만, 이 스구로라고 하는 ‘이상한 구석이 있는’ 의사만큼 정확하게, 고통 없이, 능숙하게 처치를 하는 흉부내과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한 ‘이상한 구석’은 희한하게도 이이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점도 포함한다.
 마침내 ‘나’의 처제가 일본의 경상도 F시 출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 F시로 가는 기회가 생긴다. 거기서 한 의사를 알게 되고, 그 의사에게, 선생, 혹시 F 의과대학에 다녔으면 스구로라고 하는 자와 동창 아니슈? 자연스럽게 질문을 했으며, 생각한 것보다 의아한 대답을 들어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지역 신문사까지 일차 왕림, 기어이 스구로의 ‘잊고 싶어 하는’ 과거를 듣게 된다. 1945년 5월. 패전이 거의 확실한 일본 땅을 향해 미국의 B29기는 쉴 새 없이 폭격을 퍼붓고, 이 와중에 몇 대는 격추당하거나 재수 없이 이륙 전에 연료 확인을 하지 않아 일본 땅에 불시착을 한 열두 명의 미군이 포로로 잡힌다. 이중에서 여덟 명이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규슈 의과대학에서 그냥 죽이느니 인류의 건강과 전쟁 의학의 발달을 위해 생체 해부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군부가 이를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 기어이 생체 실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스구로는 당시 말단 훈련의로 전후 2년 형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다.
 슈사쿠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쓴 소설. 여기까지가 책의 1부다.
 2부와 3부에는 이 모든 사실을 밝혀낸 주인공 ‘나’가 증발해버리고, 생체 해부에 참여했던 몇 명이 화자로 등장해 당시 자신들이 처해 있던 개인적 삶의 모습과 생체 해부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별 시답지 않은) 핑계, 같은 것들이 적혀있다.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같은 패전국이고, 비슷하게 침략 중 대량 학살을 저질렀으면서도 완전하게 다른 독일과 일본의 행동양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천 년을 걸쳐 유구하게 흘러온 일본인들의 혈관에는 아주 독특한 DNA가 흐른다. 여기서 말한 ‘천 년’은 일본 무신정권을 말한다. 무신정권과 사무라이의 지배 아래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어떤 수를 쓰더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계급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근데 이건 일반 백성들의 모습이었다가, 점점 개화되어 백성들의 마음속에도 자신 역시 무사 계급과 유사해지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백성들 거의 다 양반이었듯이) 그리하여 가장 고급한 가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된다. 죄 같은 것을 지었더라도 그것이 밝혀져 수치스러운 처지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유전자가 일본인은 천 년에 걸쳐 고착되어 있던 것이라고, 슈사쿠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수치’라는 단어는 내가 머리를 굴려 발견한 것이 아니라 책 뒤쪽 역자해설에 맞춤한 단어로 내 생각을 설명하고 있어서 거기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생체 해부를 시행했던 (스구로를 제외한)나머지 인간들 역시, 도쿄 외곽 신흥주택가의 주유소 사장, 양복점 주인, 목욕탕 사장처럼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패륜적 범죄를 누가 알아내 자신들을 수치로 몰아가지 않는 한, 그들은 죄의식 없이 한 평생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니 아베 총리가 미쳤냐, 힘 센 중국은 모르겠고, 비벼볼만한 한국한테 사과를 하게.
 짧은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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