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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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드레스덴 폭격과 뉴욕 세계무역센터빌딩 폭파 사건에 연루된 가족의 비극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고래 싸움에 날벼락을 맞은 보통의 인간 모습을 잘 그린 바 있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 그의 데뷔작이 이번에 읽은 <모든 것이 밝혀졌다>이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을 흐르던 브로드 강변의 슈테틀(2차 대전 이전까지 중부, 동부 유럽에 산재해 있던 유대인들의 작은 마을을 칭함) 트라킴브로드에서 있었던 학살을 찾아가는 여정. 단 두 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을 할아버지로 둔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 이 이름을 단 등장인물의 직업이 소설가이라,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상당히 아리송하지만, 독자들이여 기억하시라, 이 작품은 소설이란 사실을. 더구나 작가 자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리. 우리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는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까지 올라간다. 그해 3월 트라킴 B가 전속력으로 몰던 이중굴대 마차가 브로드 강에 처박히는 일이 벌어졌고, 이때 W 쌍둥이가 강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잔해들을 목격했는데 품목은 다음과 같았다. 뱀처럼 꾸불꾸불 엉킨 흰색 끈, 쫙 뻗은 손가락이 붙은 구겨진 벨벳 장갑 한 짝, 실이 거의 감기지 않은 실패들, 구지레한 코안경, 나무딸기와 보이젠베리, 배설물, 주름 장식, 산산조각 난 분무기 파편, 피처럼 붉은 잉크로 결의 ‘난 할 거다…, 하고 말 거다….’를 적은 필적 등등. 쌍둥이 한나와 차나가 물에 떠오른 잔해들을 밀어내며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니, 불명예스러운 대금업자 늙은 양켈 D가 쌍둥이의 시야를 막아선다. 순식간에 슈테틀에서 사람들이 모여 아수라장이 됐는데, 쌍둥이 중 눈썰미가 좋은 어린 한나가 유대인 아버지가 기도할 때 입는 숄의 깃 아래로 거품이 이는 강물을 가리킨다.
 “끄나풀과 깃털들 속에, 양초와 푹 젖은 성냥, 참새우 떼, 저당물, 해파리처럼 하늘거리는 비단 장식술에 둘러싸여서, 아직 점액질에 덮여 있어 번들거리는, 자두 속살 같은 분홍색의 여자 아기가 거기에 있었다.”
 마차와 함께 브로드 강에 빠져죽은 여인이 죽어가면서 물속에서 낳은 아기. 랍비는 이 아이를 불명예스러운 대금업자 양켈이 키우도록 의탁하고 강 이름을 따서 ‘브로드’라고 호적에 올린다. 이 브로드란 여자 아이가 열세 살이 된 1804년. 매년 그랬듯이 당시 사고를 기념하던 것이 축제로 승화되어 축제의 꽃인 인어로 분장해 거리행진을 마친 브로드가,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겁탈을 당하고,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모두 벗은 상태에서 자기보다 네 배나 더 나이가 들은 의붓아버지 양켈이 하필이면 그날 갑자기 죽었음을 확인한 순간, 창밖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으니, 앞으로 그녀의 남편이 될 콜키인. 브로드와 콜키인. 이들이 작중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7대 조부모가 된다.
 콜키인은 사랑하는 브로디와 결혼생활을 위해 남성의 의무인 돈을 벌려고 조금 위험한 직업인 물방앗간에 취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원반형 톱이 회전하다가 핀이 부러지면서 튕겨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철근으로 만든 지지대에 튕겨 콜키인의 머리통에 세로로 박혀버린다. 기적 같은 생존. 양쪽 뇌 사이에 정확하게 박힌 톱날을 제거하면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의사들의 견해. 그냥 해골에 톱날이 박힌 대로 둔라면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게 뇌의 화학작용에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콜키인의 행동에 문제가 생긴다. 어여쁜 아내 브로디를 학대하기 시작하는 것. 이미 아들 둘을 둔 이들은 이 와중에도 셋째 아들을 하나 더 만들고 결국 콜키인은 숟가락 놓고 만다. 예술품 제작과 감상과 감식안엔 세계적으로 안목이 있는 유대인들, 콜키인의 사체에 청동을 입혀 동상 비슷하게 세우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 하면, 머리에 박힌 원반형 톱을 이용해, 해시계로 쓰는 것과 동시에 소원을 비는 토템으로도 만들어버린다. 동상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나.
 150년을 별 탈 없이 살던 브로디, 콜키인의 후손들. 그러다 1941년을 맞이한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해버리는 해. 나치에 의하여 인종청소라는 명분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던 시기. 이미 그 전에도 우크라이나에선 유대인들을 학살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유대인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관습이 있어, 처음에는 나치에 귀순하자는 유대인도 있었으나, 슈테틀에 들어선 나치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유대인을 골라 회당 안에 몰아넣고 불을 싸질러 화형에 처하는 일. 회당 앞에 모든 유대인들을 집합시키고 아무에게나 먼저 걸리는 사람한테 묻는다. “누가 유대인인가. 한 명만 지명하라.” 그의 앞에 불려나온 아내 입 속에 쑤셔 박힌 총구. “말하지 않으면 쏘겠다.” 슈테틀에 단 두 명만 살아남는데 한 명이 조너선의 할아버지이고, 다른 한 명은?
 1997년.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바랜 사진 한 장을 들고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 사진엔 자신의 할아버지가 서 있고, 옆에는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숨겨준 고마운 은인 오거스틴. 비록 젊고 건강한 여인이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형편없이 늙었을 테고 아니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포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이 아닌 척하면서 아직도 살고 있는 유대인 가족 가운데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이젠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트라킴브로드를 찾아 나선다. 할아버지는 알렉산드르, 손자도 알렉산드르. 그래 손자는 애칭인 사샤로 부른다. 알렉산드르 할아버지는 여태 자신의 고향이 바닷가 도시 오데사라고 주장했지만, 오거스틴인줄 알고 찾아낸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사는 할머니와의 대화 도중에, 할아버지의 고향이 오데사가 아니라 콜키임이 밝혀진다. 콜키 역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피할 수 없었던 곳. 할아버지도 극적인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조너선이나 사샤나, 유대인의 불행했던 과거사 안에 자기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다. 곳곳에 젊은 미국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미국식 유머가 깔려있기도 하고, 각 인물 간에 얽히고설킨 드라마의 칡뿌리. 작품은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자신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소재로 쓰는 소설을 사샤에게 먼저 보내고, 사샤 역시 오거스틴 탐색작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조너선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 더는 사샤가 조너선에게 보내는 편지. 다시 한 번 보자. 조너선이 쓰는 건, 공감할 수 있는 허구로의 소설. 사샤의 글은 조너선이 우크라이나에서 겪은 일을 사실에 입각해 영어로 쓴 것. 그래서 사샤의 글 속에선 매우 어색한 단어가 출몰하고 표현도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또 사샤가 조너선에게 쓴 편지는 자연스레 사실과 허구의 간극이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뒷부분에 가면) 보여준다. 아주 재미있는 구성.
 엇! 근데 이제 보니 품절이다. 왜 그랬을까. 민음사가 예전 같으면 이런 책 품절되면 조금 있다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찍고는 했건만, 이제 눈치를 보니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잘 팔리는 가즈오 이시구로 말고 다른 책은 3년이 넘도록 한 권도 내지 않아 과연 절판을 시키고 말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전적으로 그 사람들 마음대로이긴 하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하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다 하나도 써놓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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