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 - 연인희곡총서 5
김성희 지음 / 연극과인간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본인 스스로 극작가이며 한양여대 문학창작과 교수로 재임 중인 김성희가 직접 고른 열 편의 한국 현대 희곡. 한국극예술학회가 엮은 두 권의 희곡집은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 책은 1974년부터 1994년까지의 작품에서 골랐다. 이제 시대는 1972년 10월 유신을 시작으로 1987년 6.29 선언까지 본격적인 한국적 민주주의이자 한국적 파시즘의 시대가 펼쳐지고 이후 자동차, 철강, 화학, 건설, 조선 등의 중공업, 반도체의 발전에 힘입어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세계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기 전,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한 민주화, 세계화가 이루어져 각 계층의 목소리가 광장에 쏟아진 백화제방의 시대까지의 희곡들 가운데 제목대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을 수록했다. 말 그대로 격랑의 시기였다. 한국전쟁이 숱한 사람들의 피를 뿌린 거대지진이었다면, 74년부터 94년까지는 독재와 민주투쟁,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뿌리내렸던 천민자본주의의 시대였다.
 1970년의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벼락같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각성을 겪어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연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시대의 종말 이후 광주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탄생한다. 정의사회구현사제단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역시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엄혹한 파시즘 정권 아래에서 극작가들 역시 도전적으로, 마치 1920~30년대 카프 문학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정권과 부르주아에 의하여 핍박받는 국민들의 삶을 직접,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며, 파시즘 정권은 공연 불가 판정과 작가 일신상의 불이익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 책에서도 첫 작품, 윤대성의 <출세기>는 사북 탄광에서 일어난 매몰사고와 갱내에서 16일을 버텨 당시 세계기록을 세운 김창호를 내세워 비정한 자본주의와 황색 저널리즘에 대해 일침을 가했는데, 이는 1967년 충남 청양의 한 탄광에서 매몰 후 16일 만에 구조된 양창선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고 아이러니컬하게 박정희 암살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초기시절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무신정권의 도방이 만들어지기 전, 사북 탄광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기도 한다. 당시엔 내용 상 어쨌건 간에 체제비판이라기보다 천민자본주의와 저널리즘을 풍자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공연이 가능했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은 남북전쟁이 아니라 가상의 집단체제인 동서전쟁 중 순박한 청년의 희생을 다루면서 사실상 군인출신의 현 정권에 대한 비판 역시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가 취한 행동은 1975년 작품으로 공연을 위해 거의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공연예술윤리위원회로 하여금 ‘공연불가’ 결정을 극단劇團에 ‘하달’하는 것이었다. 1975년이면 통기타, 미니스커트, 외국어 이름 등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수많은 가수, 희극배우 등에 대하여 방송출연 금지를 단행했던 야만의 시절이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이 책에 작품을 수록시킨 극작가를 보면, 윤대성, 박조열, 이근삼, 최인훈, 오태석, 이강백, 윤조병, 정복근, 조원석, 이만희, 이리 열 명이며 드디어 극작가 가운데서도 여류 작가 정복근이 처음으로 소개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또한 백낙청의 유명한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민족문학’ 담론을 처음으로 꺼낸 시기였으며, 문단은 ‘창작과비평’을 맹주로 한 리얼리즘 문학과, ‘문학과지성’을 지주로 해 명맥을 확실하게 이어간 순수문학의 시기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창비 또는 리얼리즘 계열이 우세했다고 판정할 수 있는데 그건 놀라운 수준의 경찰주의 또는 선군주의 적的 압제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이 희곡선집의 전반부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윤대성, 박조열, 이근삼(아벨만의 재판)은 현재 시점에서 또는 과거 시점을 이용하여 현 체제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풍자적 작품을 썼으며, 최인훈(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은 순문학적 토대 위에서 민족문학 계열에서 볼 수 있는 민중 메시아(어린 장수)의 탄생을 소재로 했다.
 오태석(자전거)과 이강백(봄날)은 한국의 토속적 소재로 각기 특색 있는 우화적 드라마를 이 책에 담았다, 윤조병은 결혼하는 날 결혼식장에서 도망해버린 신혼부부를 주인공으로 갖가지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복잡한 연극을 만들기도 한다. 오태석, 이강백, 윤조병의 작업은 1980년대 초반, 1984년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박정희 독재보다 훨씬 가혹한 통치를 한 깡패 전두환 정권을 지내면서 나름대로 생명유지 장치를 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탄압을 가장 효과적으로 피해가는 방법은 우화寓話, 우의寓意, 상징象徵인 것이 분명하니까.
 이후엔 창작을 하는데 특별한 제약이 없는 시대로 접어든다. 그래 정복근, 조원석, 이만희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대로, 표현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지난 시절의 파시즘 치하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희생을 그렸으며(정복근 <실비명>, 조원석 <박사를 찾아서>), 단군 이래 가장 부유했던 1993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 이르러서는 촌스럽게 리얼리즘이니 순수문학이니, 더구나 민족문학 같은 구분은 전혀 따지지 않고 마음 놓고 늙은 도굴꾼 세 명을 등장시켜 인생과 삶에 대하여 논한다.(이만희 <피고지고 피고지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품들이라 각 희곡의 무대, 당시의 생각, 사조, 사건들이 아주 친숙해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고, 시기적으로도 가까워 앞에 읽은 1910년대부터의 대표 희곡 스물세 편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또, 내가 뭘 알까마는, 각 작품의 질도 (당연히) 매우 세련되고, 수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최인훈을 빼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 극작가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평생 연극과 영화계에 종사하거나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도 극작가로서 이들의 전문성을 더 확실하게 하지 않았을까. 앞 세대 선배들은 극작가로 시작했다가 TV 드라마 작가, 라디오 연속극 작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로 진출한 반면, 1970년대 후반부터는 TV에도 전문 연속극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 맞습니다. 김수현. 김수현의 등장 이후 극작가가 TV 드라마를 맡는 경우가 대폭 줄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극작가 본인의 생계에는 타격을 주었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나라 연극계엔 뜻하지도 않게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 세상에 다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다 나쁘기만 한 것도 없으니, 그러면 됐지.
 이 책, 정말 한 번 읽어보시라. 우리나라 희곡 수준도 이 정도면 꽤 괜찮다. 문제는 책이 품절이란 거. 나도 헌책방에서 샀는데, 책에 밑줄 그어져 있고 뭐 그렇다. 그냥 시간 나면 동네 도서관 이용하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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