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굳이 제목을 ‘키친’이라 한 건 원제 <キツチン>을 영어로 보냈다가 다시 한글로 쓴 거다. 일어 ‘キツチン’을 음가 그대로 한국말로 쓰면 ‘키쯔찡’ 정도. 학창시절에 잠깐 일어 독학할 때 제일 애먹었던 것이 카타카나 문자를 해독하는 일이었다. 그땐 요새 젊은이한텐 그냥 줘도 안 읽는 <공산당 선언> 같은 거 읽어보려면 죽으나 사나 일본어 공부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일어 독학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제목을 그냥 ‘부엌’ 또는 우리말 쓰는 걸 그리 천하게 생각하면 ‘주방’ 정도로 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서 쓸데없는 말 덧붙였다. 요시모토 바나나. 1987년에 바로 이 책 <키친>을 히트시킴으로 해서 등장과 더불어 잘 팔리는 작가로 이름을 굳건히 한다. 그때 하도 찬란하게 한국의 매스컴에서도 난리굿을 벌이는지라, 괜히 가자미눈을 뜨고 이이를 꼬나보고 있다가, 정작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 한국에선 1999년에 초판이 민음사에서 나오고, 10년 후인 2009년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란 형식으로 중판이 나온다. 초판의 책 광고에 이렇게 써놓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가볍고 경쾌하게 글을 쓴다. 가볍고 경쾌하다는 건 그의 글이 경망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의 글에는 심하게 고통받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심연에 빠져 허덕이는 이도 없다. 그들 또한 상처를 받고 상실에 슬퍼하지만 서로를 다독이는 따뜻한 분위기 속에 생을 꾸린다.”


 요시모토의 다른 작품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볍고 경쾌한 글을 쓰는지 아닌지 굳이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키친>에 들어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은 전혀 가볍지도 않고 경쾌하지 않다. 경쾌하기는커녕 화자 ‘나’를 포함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심하게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스스로의 심연에 빠져 허덕인다. 그러다 상처와 상실 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들면 진짜 삼류소설이 될까봐 어떻게 해서든지, 예를 들어 친구와 애인 사이의 남자가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자 돈까스 덮밥을 싸들고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조그마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거나, 안개 낀 한 겨울의 새벽 5시 5분 전에 다리 위에서 이미 죽은 애인의 유령을 만나는 식으로 삶과 화해하는 거다.
 등장인물로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완전히 외톨이가 된 인물, ①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성전환을 해 여자의 몸으로 갓난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 겸 엄마, ② 그 아버지 겸 엄마가 불의의 폭행사고로 살해당한 이제는 다 큰 아들. ③ 4년의 애인관계 끝에 교통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죽어버린 여자와 애인의 동생. ④ 형과 함께 교통사고로 죽은 자기 애인을 잊지 못해 애인의 교복인 (치마를 포함한)세일러 복을 입고 다니는 남자애, 등등. 주인공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면 이 책은 일본의 1980년대 젊은이들의 우울과 고독과 상처와 내밀한 위안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장 주된 병증은 억지로 외면하고자 하는 우울증이란 걸 금방 알아낼 수 있다. 완전 개인의 취향이지만, 이 책 역시 일본의 사소설들과 유사하게 다 읽은 다음에 뭔가 좀 찜찜하게 남아있는 개운하지 못한 정서를 가득 느끼게 된다.
 세 편의 단편 가운데 앞의 두 편, <키친>과 <만월>은 연작 형태이며, 마지막 <달빛 그림자>는 추천을 받아 요시모토가 등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작가후기에 쓰여 있는 독립된 작품이다. 일조시간이 짧아져 비타민 디 흡수량 부족으로 가뜩이나 우울증이 도지는 시절에 굳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읽어 불행한 일을 초래할까 겁난다. 이왕 읽으시려면 해 길어지는 내년 봄에나 읽어보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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