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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로호프 단편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8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표 단편 <인간과 운명>과 대표 단편선집 『돈 강 이야기』 가운데 열세 편, 합해서 모두 열네 편의 단편 작품을 모은 책. 열네 편의 작품 몽땅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리얼리즘 문학과 달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쓰인 다분히 체제선정용 문학 장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놀라운 것은 숄로호프가 <고요한 돈 강>을 발표하면서 작품 속에 카자크 족에 의한 반혁명 반란의 미화와 관련해 스탈린에 의해 내용에 관해 지적받은 적이 있으면서도 제 1회 스탈린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 이거 궁금했었다. 근데 이 책의 해설을 보니 막심 고리끼가 주선을 해 숄로호프가 스탈린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고요한 돈 강>의 3부도 곡절 끝에 출판할 수 있었으며 상까지 타냈단다. 거기다가 “소련작가동맹회의 대표”란 감투까지 덜커덕 쓰게 되니 행운아라고 할 밖에. 아울러 막심 고리끼의 소련 내 끗발도 정말 대단하다. 하긴, 이름이 막심 고리끼, 우리 말로하면 “매우 쓰다”란 뜻이니.
나중에 숄로호프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출간하는데 정부 당국이 심통을 부려 출간은커녕 엮어 넣으려고 할 때, 표현의 자유의 편에 서서 솔제니친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음에도, 솔제니친은 숄로호프가 쓴 <고요한 돈 강>애 대하여 (숄로호프 사후인지는 모르겠다만) 표절시비를 제기했다고 한다. 난 솔제니친과 그가 쓴 작품은 다 싫어하는 안티 팬으로 글쎄, 숄로호프의 작품집 『돈 강 이야기』를 읽어봤으면 쉽게 표절시비를 할 수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말씀드리자면, 표절 논의가 누구 작품을 베껴 썼다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이가 쓴 것을 자기 이름으로 냈다는 걸로 아는데, 1999년에 자필 원고가 발견되고 이에 따라 어떤 유명한 이가 수행한 “원고에 기초한 방대한 연구 성과”를 계기로 논란이 진정됐다고, 이 책의 해설에 나와 있다. 하여간 난 솔제니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솔제니친 건은 더 얘기하지 않겠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관하여. 이 장르의 대표주자를 들자면 스탈린에게 숄로호프의 배알을 청할 정도의 원로 막심 고리끼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단 한 편의 작품으로 고리끼와 비견되는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공통점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으니,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이다. 이런 인간들을 다룬 대표적인 책이 피터 애클로이드가 쓴 <플라톤의 반란>. 서기 3,400년, 그들은 인류 최후의 혁명을 완수했다고 주장하는데, 혁명 후 러시아와 진짜 흡사하다.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완벽한 정의와 높은 이상,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가진 휴머니스트들의 출현.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의 신념에 대해 돌이켜보고 의심하는 변증법적 두뇌회전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단순한 인간들. 뭐, 양보해서 고리끼나 오스트로프스키 같은 이들은 혁명 전 또는 혁명 중이었으니, 혁명의 완수를 위한 문화운동으로 일반 인민들의 의식화 교재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억지로) 이해해줄 수 있지만, 혁명 후에도 변하지 않고 유구하게 소비에트 리얼리즘 문학을 하는 이들은? 이해해줘야 한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숄로호프만 보더라도 위대한 작품 <고요한 돈 강>에서 자신이 낳고 자란 땅, 돈 강 유역의 카자크 족들이 조상대대로 황제와 조국을 수호한 전통으로 반혁명군을 지지하여 적군赤軍과 교전을 벌이는 걸 다분히 호의적으로 썼다가 소련 땅에서 출간을 하느니 마느니, 콩밥을 먹느니 마느니 이 지경이 돼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새로운 파시스트 스탈린이 보는데서 초연으로 올린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작곡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CIA, 아니, KGB한테 잡혀가 총살을 당할지 몰라 잡혀갈 때를 대비해 (꼴사납게 잠옷 바람으로 끌려갈 수 없다고 생각해)집안에서도 정장 비슷하게 입고 있었던 딱 그 시절이다. 그때 <고요한 돈 강>을 썼다. 비록 작품을 출간하는 건 성공했을지라도 스탈린 죽을 때까지 심심하면 스탈린이 직접 “그 책 이 부분하고 저 부분은 내용을 좀 고쳐서 다시 찍어라.”라고 참견을 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다음부터는 소위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복무하는 작품들은 써야했지 않겠어.
근데 왜 책에 나오는 열네 편의 단편소설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숄로호프와 <고요한 돈 강>만 가지고 떠드느냐 하면, 만일 숄로호프를 읽어보고 싶으면 <고요한 돈 강>을 읽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으며, 그 책을 진짜 읽었다면 굳이 이 단편집까지 찾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 그 동네에서 벌어지거나 돈 강 유역을 지나가는 사람에 의한 과거회상(<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며,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돈 주고 사 읽으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결정은 당신이 하시라. 내 경우엔 <고요한 돈 강>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단편소설집이 있는 걸 알고, 이럴 줄 번히 알면서 아주 나중에라도 그냥 한 번 읽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