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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대표희곡 선집 1
한국극예술학회 엮음 / 월인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도서출판 월인”이라고 있다. “연극과 인간”과 같은 회사로 내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희곡과 연극에 관해서 가장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출판을 하고 있는 단체다. “연극과 인간”에서 나온 중국현대희곡선집 여덟 권을 읽으면서, 한국의 현대희곡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실이 정말 창피했다. 그래서 꼭 한국의 희곡작품을 읽어보리라 작정을 하고 책을 찾던 중, ‘도서출판 월인’에서 나온 이 선집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은? 1917년 이광수가 쓴 <무정>. 이건 중학교 이상의 학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안다.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희곡은? 나도 어제까지 몰랐다. 조중환이 1912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한 <병자삼인病者三人>이다. 매일신보는 이 희곡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1912.11.6.일자 신문에 사고社告를 게재했다.
“금번에 본사에서 가장 참신한 연극재료로 취미 진진하고 포복절도할 각본(脚本)을 창작하여 명일부터 본지에 기재하겠사오니 보시오 제군이여 제일착으로 희극 병자삼인(病者三人)이라 하는 것이 출생할 터이오며 그 내용에 활해(滑稽)할 사실은 독자로 하여곰 배를 쥐이고 허리를 분지를지라 이 오늘날 이십세기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 우승열패함은 정한 이치라 제군도 명일부터 그 내용을 보시면, 아시려니와, 겸하야 이 각본을 연극으로 할 날이 있을 터이오니, 하나도 누락없이, 잘 보아 두시면 일후 연극할 때에는, 실지로, 그 광경을 보시고, 다대한 흥미를, 도울 줄 믿사오니 더욱 애독하시오”
이 책에 든 희곡을 쓴 극작가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조중환, 조명희, 김정진, 김우진, 송영, 유치진, 유진오, 백철, 임선규, 채만식, 함세덕, 김사량, 오영진.
모두 열세 명의 극작가가 쓴 열네 편의 희곡.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에서부터 지금도 자주 무대에 올리는 유치진의 <토막>, 우리나라의 대표적 슈프레히코어 작가 백철의 <수도를 걷는 무리>, 불후의 명곡 “홍도야 우지마라”의 원전이 되는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시집가는 날>로만 알고 있던 오영진의 사회비판적 희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까지 한국전쟁 전 시기의 대표희곡을 감상할 수 있다.
멍징후이가 쓴 <워 아이 XXX>를 읽으면서 생소하면서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표현방식을 '슈프레히코어'라고 한다는 것도 <수도를 걷는 무리>의 해설을 통해 알게 됐으며, 슈프레히코어 방식의 공연을 하면 연극에 음악성과 집단성을 동시에 줄 수 있겠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 <워 아이 XXX>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를 하는 등장인물을 표기하지 않고 오직 “나는 빛을 사랑한다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빛이 곧 생겨났다 / 나는 너를 사랑한다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네가 생겨났다” 같은 말하기(sprechen)와 합창(chor)이 만들어낼 거대한 호소력을 체험했다.
그런데 극작가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책에 소개한 이이들의 작품은 대개 1930년대까지의 작품이다. 나는 단박에 이유를 알아차렸다. 대부분의 극작가들(오영진을 빼고)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 본격적인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친일부역 작가라는 멍에를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유치진, 유진오, 백철, 채만식, 오영진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건 카프 문학을 거쳐 “조선연극동맹”에 집결하여 대부분 월북한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에서 북측 참전문인으로 활동하다 폭격을 당해 숨을 거두기도 한다.
채만식의 소설작품들은 몇 개 읽어봤지만 희곡은 처음 읽어보는 것. 나만 그렇지는 않을 거 같다. 이 책에 실린 <제향날>에서 채만식은 소설에서 보는 풍자를 넘어, 동학혁명 때 접주를 하던 남편이 죽어 청춘과부가 되고, 기미독립운동 때 앞줄에 섰던 아들이 청국 상해로 넘어가 독립군이 되고, 이제 하나 남은 손자가 일제치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나중에 하근찬의 <수난이대>보다 20년 앞선 리얼리즘 적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걸 알기도 했다.
재미는 차치하고, 우리나라 희곡사상 의미 있는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 1세기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희곡부터 모은 선집이라 누백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희곡과 직접 비교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조촐한 유산도 알뜰하게 챙겨 읽는 독자가 있어야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도 빛나는 극작가가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께서도 일독을 하심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이 “코미디”인 것이 참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