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펭귄클래식 123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송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음악사에서 모차르트 다음으로 치는 천재가 조르주 비제라고 들었다. 메리메의 <카르멘>은 다분히 비제의 오페라에 힘입어 21세기에도 찾아 읽는 독자가 제법 있다, 라고 해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카르멘>을 관람하거나 읽는 사람들은 거의 다 집시 카르멘이라는 팜 파탈적인 매력과 돈 호세의 질투 심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카르멘, 천한 아름다움의 소유자. 당시 유럽의 가장 낮은 카스트caste로 귀족 가문의 귀여운 아기를 보거나 만졌다는 이유 하나로도 가차 없이 살해당할 수 있었던 불가촉천민.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높은 가치, ‘자유’를 위하여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랑 생활을 하며 각종 범죄와 매춘, 공연 등으로 생활을 꾸려간다. 나름의 율법이 있으나 서구인들의 시각으로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이들 계급의 구성원으로의 아름다운 카르멘. 애초부터 그녀를 사랑하는 유럽 남성에겐, 그가 누가 되었던 간에, 정상적 기독교인이라면 여인을 향한 사랑 속에 불행을 가득 담고 있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집시 계급의 카르멘 역시 가장 높이 여기고 있는 가치는 자유였기 때문. 심지어 사랑조차도. 비제의 작품에서도 “사랑은 자유로운 새”라고 노래한다.

 

 제임스 레바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실황, 아그네스 발차


 반면에 카르멘의 상대역인 돈 호세는 스페인 북부 프랑스 접경지역 출신. 아직도 스페인과 분리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이들의 성격은 대단히 완고하고 전통 기독교적인 삶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특징. 즉, 한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하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정착해서 아이들 낳고 키우며 ‘부부가 함께’ 늙어가야 한다는 거다. 배우자에 대한 비타협적 소유권은 너무도 당연한 것.
 이리하여 스페인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소수민족 출신 돈 호세와 율법과 관계없이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카르멘은 서로 사랑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고 문호근 선생이 예술의 전당 예술 감독 재직 시절에 했던 강연의 일부 내용임을 밝혀야겠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카르멘>의 기본 개념은 “문화의 충돌”로 봐야, 또는 읽어야 한다.
 그래, 맞다. 사랑이나 혼인 같은 건 비슷비슷한 인간들끼리 하는 게 가장 좋은 법이다.
 <카르멘>은 지리학자인 화자가 카슈나 고원을 지나다가 나팔총을 옆에 낀 강도 또는 밀수꾼처럼 험악한 인상의 남자를 얼굴을 익히고, 나중에 이 밀수꾼이 살인사건 가해자로 사형집행 전야에 감옥 안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풀어간다.
 바스크 지방에서 잘 살고 있던 돈 호세가 그 동네의 오락거리였던 폼(손으로 공을 치는 테니스 비슷하단다) 경기를 하다 싸움이 벌어져 고향을 등져야 했는데 이때 스페인 육군에 입대해 세비야의 담배공장 근처를 지켜야 했다. 인연이 되려는지 담배공장에서 여공의 얼굴을 X자로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같은 여공이자 폭행사건의 범인인 카르멘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여러 지방을 이동해가며 살던 카르멘은 바스크 사투리에도 익숙해서 돈 호세에게 바스크 말로 접근해 카르멘이 돈 호세를 때려눕힌 것처럼 꾸미고 도망을 쳐버린다. 이때가 돈 호세에게는 상사로 진급할 기회였다. 하지만 카르멘 탈출로 진급은커녕 구류와 한 계급 강등처분을 받고 만다. 이젠 돈 호세의 눈에는 카르멘 하나밖에 없다. 군대 상관을 죽이고, 카르멘의 남편, 애꾸눈 가르시아를 죽인다. 호세는 애꾸눈 가르시아도 자신과 같은 비타협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해 카르멘의 남편을 죽였을 뿐이다. 그래야 비어있는 자신이 카르멘의 유일한 남자가 될 터이니까. 그러나 늙은 집시 단카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자네가 그에게 카르멘을 요구했다면 그는 일 피아스타에 팔았을 거야.”
 돈 호세가 카르멘의 남편 애꾸눈 가르시아를 죽이는 행위. 이 작품의 근본이 되는 것, 일찍이 문호근 선생이 이야기한 “문화충돌”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일은 없겠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메리메의 <카르멘>보다는 비제의 <카르멘>이 훨씬 좋았다. 비제는 적어도 이야기의 줄거리를 메리메에서 따왔지만 부속 내용은 스스로 첨가했으니 대표적인 것이 미카엘라와 에스카미요. 비제의 극에서는 가장 중요한 조연이지만, 책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미카엘라), 상당히 작은 배역(투우사)을 담당할 뿐이다. 그래서 오페라의 줄거리가 원작의 것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몇 안 되는 소설일 거 같다. 단편과 중편 사이의 짧은 소설이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라. 말리지는 않겠지만 권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두 작품, <카르멘>과 중편 <콜롱바>가 실려 있다. <콜롱바>는 키 작은 영웅 보나파르트의 출생지 코르시카 섬을 무대로, 다분히 남부 이탈리아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가족 단위로 벌어지는 복수극, 소위 ‘방테타’를 주제로 한다. 그거 있잖은가. 남자가 여자한테 객쩍게 집적거리면 여자는 남자 형제들, 오빠나 동생 관계없이 남자 형제들에게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하게 한 남자를 지목하면, 남자 형제들은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수단으로 복수를 하는 장면. 여자한테 함부로 윙크 한 번 했다가도 이런 봉변을 당할 수 있는데, 만일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암살했다면? 이거야말로 법은 나중에 얘기하는 거고, 방데타, 이탈리아 말로 Vendetta, 복수를 하지 않으면 코르시카에선 남자로 가장 큰 불명예를 저지르는 일이다. 매사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퇴역 중위 오빠와 달리 지역 정서에 맞게 숙적이자 아버지를 암살했다고 믿어, 바르치니 가문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는 여동생 콜롱바.
 굳이 선호를 얘기해야 한다면, 나는 <카르멘>보다 <콜롱바>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읽었다. 메리메가 26년간 프랑스 문화재 총감독관으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각지와 코르시카,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을 고루 여행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수록된 두 작품 모두 타국으로의 여행 온 사람들이 현지인들을 관찰해가며 ‘타인의 눈’을 통해 본 현지 문화를 묘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19세기엔 유럽인들에게 흥미를 줄만한 작품이었을지 모르나, 벌써 21세기. 오페라 <카르멘>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원작을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나 아닌 분들은? 뭐 알아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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