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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이 책을 번역한 역자 이세욱. 24세부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불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단다. 당시 서울사대 불어과를 졸업하면 자동 교사임용이었던가 그랬다. 2017년 1월에 ‘안나 가발다’란 프랑스 여성의 작품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를 출간할 때 책을 낸 북로그컴퍼니의 포스트를 보면 역자 이세욱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르 클레지오, 미셸 우엘벡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수십 년간 번역해오신(아 씨, 간지러워!) 프랑스 문학 번역의 베테랑”이며, “이탈리아의 천재 작가 움베르토 에코에 심취하여 이탈리아어를 새롭게 공부한 뒤, 에코의 소설과 에세이를 옮겨서 평단과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단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발표한 것이 1980년. 미국에서 번역 출판한 시기가 1983년.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일본보다 빠른 1986년. 이세욱이 처음으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시기. 이탈리아어는 이때부터 배웠다고 감안하면 2008년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번역하기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언어습득에 진정한 수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어 번역을 계속하면서, 심지어 다른 이도 아니고 에코를 번역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한다니, 감탄의 넘어 한탄이 나온다. 에고, 여사님. 나도 이런 재주 하나 갖게 만들어주시지 어쩌자고 이 모양 이 꼴로 낳아놓으셨대요, 라고. 그럼 이이는 한국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이렇게 적어도 네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거 아냐. 거기다가 이 책 직접 읽어보시면 안다. 우리말도 어찌 그리 잘 쓰는지, 읽어나가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다. 오식이 눈에 띄지만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가운데 typo 없는 책은 한 권도 없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가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러운 한국말 문장, 마치 에코가 한국어로 작품을 쓴 거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진짜다(아니 조금 과장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책을 펼치면 목차가 나오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일러두기’가 있는데 첫 번째 일러두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대문호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프라하의 묘지』라 하는 세계적 화제작을 이탈리아어에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
책의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을 빌어 또 이리 썼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에코가 『프라하의 묘지』 번역자들에게 보내는 짤막한 지침을 받았다. 그중에서 문체와 관련된 항목은 두 가지였다.”
본인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면 정말 이탈리아어 직역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거다. 누구처럼 중역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이탈리아 출판사에 계속 로열티 지불하는 건 아니겠지. 서울대 홈페이지에도 이세욱을 가리켜 ‘스타 번역가’라 해놓고 대표작으로 에코의 이 책을 꼽는 걸 보면 말이지. 우리나라 출판계가 조금, 아주 조금, 진짜 쬐끔 개판이라 이런 천재가 나오면 의심부터 하게 되는 일(프랑스어 번역 책보고 다시 중역하면서 가끔 원서를 참고한 거 아냐?)이 웃프다, 웃퍼.
그럼 이세욱이 도대체 누구야? 구글 검색하니 사진이 나오긴 하는데, 남의 얼굴을 함부로 개인 서재에 올리다 나중에 코피 터질까봐 사진 말고 스케치를 골랐다. 사진보다 약 20배는 잘 생기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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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프라하의 묘지>로 왔다.
이거, 남의 일기 훔쳐보는 일이다. 파리에 사는 세 사람의 시선이 나오는데 먼저 화자. 그리고 달라 피콜라라는 이름의 퉁퉁한 신부. 한 명 더. 문제의 인물,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1830년에 태어난 시모네 시모니니. 일기는 이 시모니니가 1897년 3월 24일부터 시작해 1898년 12월 20일에 쓰기를 중단한다. 남의 일기를 가끔 피콜라 신부가 훔쳐보며 대담하게도 같은 일기장에 끼어들어 시모니니가 모르는 내용을 끼워 넣기도 하고 사실과 다르다고 시비도 한다. 이 세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글자체를 달리해서 사용한다. 이건 에코가 주문했던 바라고 ‘옮긴이의 말’에 설명한다.
그럼 제일 중요한 것, 도대체 시모니니가 누구야?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에코의 말이 진실이라면, 유일하게 창작된 가공의 인물이란다. 이 시모니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왕정주의자에다가 교황 성하를 모시는 가톨릭 맹신자인데 반해, 아버지는 공화주의자로 가리발디든가 마치니든가, 하여간 그들 수하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중 전사해버리는데, 이들도 진짜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하니 할 말 없다. 젊어서 아버지가 전사해버림으로 해서 주인공 시모니니는 할아버지의 반유대주의와 반 프리메이슨 사상을 확실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다. 법학을 전공했으며 당시 관습으로는 법과대학을 졸업하면 습관적으로 변호사라고 호칭했단다.어쨌거나 시모니니가 '변호사 선생'으로 불리게 되자마자 할아버지가 졸卒하면서, 담당 공증인이 사문서를 근사하게 위조하는 바람에 졸지에 거지꼴이 되어 사기꾼 공증인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정의감이나 소명의식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던 시모니니(인간이 확고한 철학을 갖게 되면 내 아버지처럼 일찍 죽게 되어 있는 법이야!), 타고난 천재적인 글자 위조와 문장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희대의 사기꾼으로 성장한다.
그의 화려한 변신, 가리발디의 수하에 소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피에몬테 지역의 왕정주의자와 양다리를 기막히게 걸치고 있던 시모니니는 가리발디를 돕기 위해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시칠리아에 도착한 알렉상드르 뒤마와도 만나고, 아무 가책도 없이 가난한 염초장焰硝匠(화약전문가)를 이용해 배를 폭파시켜 수십 명을 어복魚腹에 장사지내게도 한다.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반 프리메이슨, 반 유대 음모를 총 정리해,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메이슨 또는 유대인집단의 우두머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세계멸망, 즉 프리메이슨이나 유대인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상상 속의 회합, 회합에서 논의한 주제와, 결론 또는 성명서 등을 꾸며낸다.
그러면 이들이 어디서 만나는 것으로 할까. 런던이나 파리, 또는 베를린이나 빈, 아니면 로마나 취리히? 너무 큰 도시면 근 백 명에 달할 이들의 대표단들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안 돼, 안 돼. 잠깐 고민하던 시모니니는 프라하를 점찍게 되고, 이왕이면 프리메이슨들이나 유대인들의 음습한 기질과 맞는 장소로 공동묘지가 좋겠다고 못을 박는다. 그래 책의 제목이 <프라하의 묘지>가 되는 것. 작 중 누구도 체코 프라하에 있는 유대인 묘지를 직접 방문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오직 주인공의 뇌 속에서만 모일某日 자정, 프라하의 유대인 묘지, 묘지 확장을 거부하는 주민들의 압력으로 인해 관을 아래로 겹쳐 묻을 수밖에 없어 촘촘하게 묘비들이 박힌 음습한 밤, 프리메이슨의 각 분파대표들 또는 유대인 대표들이 모여, 전 세계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줌과 동시에 물가도 올려 결코 노동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지 않게 하며(윽, 지금 대한민국에도 프리메이슨들이 도처의 중심에 있는 거 아냐?), 오락과 스포츠 등에 광분하게 하고, 고리대금업을 비롯한 금융과 철도 등 산업 전반을 손아귀에 넣고, 정치, 군대 등을 장악해야 한다고, 토론하고 선언문을 발표한다, 라고 시모니니는 몇 번에 걸친 고서류를 만들어 비싸게 팔아먹는다. 한 마디로 사기꾼. 자기가 한 일에 관해 한 점 후회도, 반성도 없다. 심지어, 놀라지 마시라,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이 되는 첩보문서도 이 시모니니가 작성한 것으로 설정했다.
재미있겠지? 재미있다. 프리메이슨의 분파들과 반예수, 흑미사, 사탄찬미 등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에서 나왔던 주제들이 잠깐 거론되지만 그 책들처럼 머리 저린 서술이 아니라 음모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등장해 비교적 가벼운 접촉만 이루어진다. 음모와 사기로 점철한 한 기회주의자의 일생을 그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