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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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 라디오에서는 FM 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이렇게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무려 2,000 쪽에 달하는 장편을 펼치기 위해 작가는 비교적 덜 대중적인 체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실황녹음을 꺼내들었다. 독후감 시작하기 전에 우리도 <신포니에타> 실황을 먼저 들어보자.

 

Jukka-Pekka Saraste, 서부독일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2007

 

  극도의 정체를 겪고 있는 도쿄의 수도(고가高架)고속도로 위, 도요타 크라운 로열살롱 택시 안에서 도무지 약속시간까지 장소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해하는 우리의 주인공 아오마메는 <신포니아>를 들으면서 야나체크가 이 곡을 작곡한 해가 1926년이고, 1926년이면 다이쇼 일왕이 죽고 새로 쇼와로 연호가 바뀐 해이며, 유럽에서는 양차대전 사이 잠깐의 평화시기인데 2년 전에 카프카가 불우했던 세상을 뜨고 곧 히틀러라는 키 작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 아담하고 작은 나라 체코를 덥석 집어삼킬 시기임을 떠올린다. 책을 다 읽으면 이게 중요한 복선이라는 걸 늦게나마 알게 된다. 왜 하루키는 여기서 굳이 2년 전에 죽은 카프카를 언급했을까. 카프카의 대표적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그레고르 잠자’. 2,000쪽, 정확하게 1,997쪽의 긴 소설 가운데 카프카가 만든 주인공 이름이 딱 한 번 나온다. 그것도 ‘잠자’라는 성姓으로만. ‘잠자’는 다 알다시피 어느 날 갑자기 딱정벌레로 변신한 은행원.
 시간이 촉박하다는 얘기를 들은 택시 기사는 고가 고속도로에 비상구가 있는데, 비상구를 열고 계단을 타고 지상까지 내려가,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 늦지 않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고가도로로 건설된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내려간다는 특별한 일을 할 경우엔 일상풍경이 평소와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겉모습에 속지 말라고. 현실은 언제나 하나란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리송하다. 아오메마도, 대사를 읽는 독자들도. 하지만 쉽게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 아오마메가 정말로 택시에서 내려 비상구로 가 가로로 놓인 철책을 건너기 위해 하이힐을 벗고, 짧은 치마가 허리까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무릅쓰고 다리를 번쩍 들어 넘어간다. 맨 스타킹 발로 철제 계단을 내려가 지상에 도착했다.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운전사의 말을 떠올리며.
 잠자는 어느 아침에 딱정벌레가 돼버렸고, 아오메마는 거미줄을 헤치며 오랜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던 오층 높이의 (거의 사다리 수준의)철제계단을 내려오면서 잠깐 마치 뱃멀미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는데 그게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선 거였다. 즉 카프카는 잠자의 외형을 변화시킨 반면 하루키는 평행우주(라고 일단 가정하자. 지금 차원이 아닌 다른 시간 속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쪽 우주를 연결시키는 고리를 건너게 한다.
 아오마메. 푸른 콩, 청두(靑豆)란 이름의 여인의 기억 깊숙이 새겨진 한 남자. 남자라기보다 소년 덴고. ‘증인회’라는 소수 종교에 깊이 빠진 부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자란 아오마메. 일요일마다 NHK 방송국의 수신료 수금원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며 지내야 했던 덴고. 덴고는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모든 교과에 우수하고, 그 중에서도 산수, 특히 수학에 관한 한 신동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소학교 시절에 벌써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술술 풀어낸 수재 덕에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을 뿐. 과학시간 그룹과제를 하다 따돌림을 당하자 덴고가 아오마메를 자기 팀으로 들어오게 하여 원만하게 마무리 지어준 일이 있었다. 소학교 4학년 때. 그해 12월,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둘이 남게 된 날. 창밖을 바라보고 섰던 둘. 아오마메가 덴고의 손을 꼭 잡고 한 동안 있다가, 손을 놓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두 소년소녀는 급작스럽게 성장하여 소년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게 되고, 소녀는 몇 달 후 초경을 경험한다. 그러나 5학년이 되자마자 도시를 떠난 아오마메. 도시와 함께 가족에게서, 절대 이탈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종교의 굴레에서도 소녀는 떠나고 만다. 이후 아오마메와 덴고의 저 깊숙한 가슴 속에서는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끔찍스럽게 질긴 사랑으로 점점 고착되고 있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그때부터 20년이 지난 1984년.
 덴고는 학원의 수학 강사이면서 아직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유망한 작가지망생이 됐고, 매주 금요일 오후에 자신의 아파트를 찾아오는 열 살 위의 유부녀와 오직 몸의 즐거움을 정기적으로 누리며 살고 있다. 최근에는 ‘후카에리’라는 열일곱 먹은 아가씨가 쓴 소설 <공기 번데기>를, 뼈대를 유지하고 문장을 바꿔 쓰는, 소위 리라이팅re-writing을 해 약간의 수입을 올리기는 했지만 책 속의 모델이 되는 종교집단과 매우 위험한 관계에 빠져들고 만 것을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아오마메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소프트볼 특기생으로 대학까지 마치고 지금은 유명 스포츠클럽의 인스트럭터로 이름이 높아져 유명인들의 개인 인스트럭터 일도 겸하면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를 찾았다. 스물여섯 까지 처녀였다가 이후 조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가끔 바에 들러 두상이 잘 생긴 중년 남자를 골라 성욕을 만족시키고는 했다. 그러나 아주 간혹이긴 하지만 아오메마는 섬세한 손끝에서 나오는 천재적 감각의 침술로 외상外傷없이 한 목숨을 거두어가는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연하게도 다른 세상에 떨어져 서로 어디 있는지 모르나 사실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살게 된다. 덴고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고양이 마을”이라 부르고, 아오마메는 1984년을 “1Q84”년이라고 칭한다. 진짜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간절하게 바라는 일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진짜” 간절하게 바라는 일은 이해할 수 있을까? 거꾸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진짜 간절하게 바라지 않아서였을까?
 두 번째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하루키의 어쩔 수 없는 먹물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사할린에 징용간 조선인의 아들로, 홋카이도 고아원에 살다가 도망쳐 자위대 특수병과에 입대해 인간병기로 길러진 게이가 도피생활에 접어든 여성에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권하면서 감방에 가거나 도피하면서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말하고, 비트겐슈타인과 쉬르레알리즘을 서슴없이 입에 올리긴 쉽지 않을 텐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한 명 정도면. 비록 그가 일본 최악의 카스트일지언정.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는 당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 밥 딜런이 같은 상을 받았다는 측면에서만. 대중적이고, ‘새롭지는 않지만’ 재미있고, 또 많이 팔릴 책을 쓰는 능력. 이건 세계 제일인 거 같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한 바 있었듯이.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 <프라하의 묘지 1>  146~147쪽, 열린책들 2013. 밑줄은 쇤네가 그었음.)


장르소설이라 할 수 있다. 평행이론이나 차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외계 등등에 관심이 있는 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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