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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대학을 졸업하고 절친 ‘유리’를 따라 취업준비하다 스스로 직장생활 체질이 아님을 깨닫는 서나연. 그래 꽃꽂이, 자수, 수예 같은 자격증을 따고, 통통한 몸집에 어울리게 음식 만드는 거, 먹는 거 좋아하는지라 당연히 요리 자격증도 딴다. 나연은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해 냉장고에 들어있는 재고 식재료의 범위에서 가장 맛난 아침을 해먹는다. 아침을 해먹자마자 점심엔 뭘 해먹을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다가 역시 냉장고 안에 들은 재고 식재료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장 맛난 점심밥을 또 해먹는다. 하여튼 책 안에선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이나 반찬 또는 기타 음식을 다시 데워 먹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점심밥을 먹자마자 저녁엔 뭘 먹을까를 구상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먹는 일 틈틈이 3년째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성우와 만나 영화도 보고, 성우는 좋아하지만 자기는 전혀 관심 없는 농구 이야기도 들어주고, 근데 성우는 언제 결혼하자고 할까, 의심을 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며 지금은 친구 유리의 애인이자 자신의 ‘말 그대로 친구’, 다만 성 염색체만 자기하고 조금 다른 친구 지훈이하고 저녁 먹은 얘기, 영화 같이 본 얘기 등을,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애인 성우한테 툭툭 던짐으로 해서(얘, 바보 아냐?),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이딴 식이라 성우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천진무구한 20대 후반의 아가씨였다가 이젠 30대 초반의 아가씨.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천진무구, 좀 언짢은 말로 하자면 아무 개념 없이 사는 서나연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 아버지(미국에 사는 별거중인 엄마에 관해서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언니, 고등학교 동창생들 열 명과 그 중에서도 뛰어난 미모의 은주, 대학시절부터 온갖 고민을 공유했던 두 친구, ①수진과, 자기 애인이 될 뻔한 지훈을 재빨리 자기 애인으로 삼은 ②유리, 이들이 주로 연애관계로 엃히고설킨 이야기. 한 마디로 수다.
일찍이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언니가 엄마 배속에 듦으로 해서 결혼에 이르렀고, 그래 나연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별거를 시작한(것처럼 보이는) 부모를 보며 자기는 어쨌거나 서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는 진짜 순진한(어리석은과 비슷한) 나연. 십년을 연애하고서도 다른 여자 새로 만나 결혼해버린 애인한테 걷어차인 은주, 어쩌다보니 ‘네 이웃의 남자’ 즉 유부남과 얽혀버린 똑똑한 수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유리, 이들 사이에서 나연은 지훈과 진짜 친구 사이를 유지함으로써 제 애인 성우와, 지훈의 애인 유리를 돌아버리게 하는 걸 전혀 짐작 못한다. 이쯤 되면 이건 순진, 천진한 게 아니라 좀 모자란 거 아냐? 하여간 마음씨 하나는 좋아서 이웃들 챙겨 먹이는 걸 즐겨하고, 친구를 위해 자기가 연애하고 싶었던 지훈이도 넙죽 가져다 바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 진짜 있기는 있다.
근데 사람은 보이는 면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걸 차근차근 알게 되는 나연. 이걸 뭐라 해야 해, 성장? 하여간 비슷한 건데, 알고 보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느므느므 사랑해 양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애(나연의 언니)부터 만든 다음, 양가의 입을 다물게 해놓고 결혼에 성공했는데, 진짜로 결혼을 해보니 그 염병할 사랑이란 것의 유통기한이 진짜 짧다는 진실 앞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어쩌다 또 덜컥 나연까지 만들어버리고 만 것. 급기야 나연이 열 살이 되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혼은 아니고, 같이는 못살겠고 해서 별거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
언제가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언니란 년의 대학 후배, 같은 동아리활동을 했다는 남자에게 “동아리에서 선언문이나 격문, 이딴 거 전담했겠지요 뭐.” 시니컬하게 얘기했다가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언니가 문학 동아리에서 그놈의 ‘시’를 썼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고 나서 다시 언니를 관찰해보니, 소 안심과 왕새우에 초콜릿 무스 디저트보다는 가래떡 넣고 무친 잡채를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 사람은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다간 코피 터지는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간다. 다른 사례는 생략함. 왜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니까.
먹는 얘기로 치면, 맛보다는 요리에 중점을 둔 이야기. 레시피 같은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책만 보고는 아무 것도 성공적인 요리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수준. 맛에 관해서 말하자면 뮈리엘 바르베리의 짧은 소설 <맛>의 아기자기한 혀의 감촉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서, 사실 요리나 맛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와 실연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 해야 마땅하겠다. 중산층 이상 가정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의 사랑 타령. 걔네들도 사랑은 쉽지 않나보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 이별하고,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노래하는 것이 지나가는 청춘이지, 인생 별 거 있어? 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