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 그리고 2001년 여객기에 의한 뉴욕 무역센터빌딩 테러. 두 사건의 공통점은 놀랄 만한 수의 민간인 희생이다. 책은 우연하게도 두 사건의 희생자가 된 독일 출신 미국 이민가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은 아홉 살짜리 똑똑한 소년 오스카 셸의 시각으로 쓰여 있다.
 나날이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던 가족. 전쟁 중이지만 그나마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됐던 독일 남동부의 오랜 도시 드레스덴에, 갑자기,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무차별 폭격이 벌어져 어쩌면 큰 고모가 됐을 지도 모를 아이를 배에 담고 있는 할아버지 토머스의 약혼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56년 후 평화로운 가을의 어느 화요일 오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두 대의 보잉기가 각각 들이받아, 나, 아홉 살짜리 아들과 함께 엉뚱한 발명을 하고 우주 창조에 관해 토론을 하던 아빠가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다. 할아버지 토머스 셸은 드레스덴 폭격으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애나와, 애나의 태중에 있던 아이가 사라져버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발음기관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and'란 말을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앰퍼샌드ampersand(&)‘을 써서 “커피 앰퍼샌드 단 것 주세요.”라고 해야 했으며, 이튿날엔 ’...하고 싶다‘란 말이 나오지 않아 대신 ’욕망하다‘로 이야기 했다. 이어서 ’지니다‘ ’일기장‘ ’연필‘ ’잔돈‘ 등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실어증失語症‘이라 하나? 그래서 토머스는 의사소통을 위해 왼 손바닥엔 ’YES‘, 오른 손바닥엔 ’NO‘라고 문신을 새기기에 이른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이 두 가지라서. 그리고 늘 공책을 가지고 다니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연필로 쓴다. 이렇게.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런 페이지가 나와도 독자가 당황하지 않는 건, 이거 말고도 심지어 다음과 같이 아무 글자가 쓰여 있지 않거나, 붉은 펜으로 잔뜩 교정해놓은 장면이 나와도

 

 



 하나도 놀라지 않는 건, 벌써 1759년에 로렌스 스턴이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생각과 인생 이야기>에서 몇 차례 써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조(물론 농담이다) 로렌스 스턴은 특정 인물의 조의를 표시하기 위해 한 페이지를 검정색으로 칠해놓은 적도 있고,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대리석 문양으로 역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경우도 있었던 건 아실 터.
 토머스의 손자 오스카는, 시신은커녕 옷자락 하나 찾지 못한 아버지를 굳이 매장해야 한다는 엄마의 의견을 좇아 빈 관을 싣고 공동묘지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선량한 리무진 기사 제럴드 톰슨에게 악의 없는 우스갯말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정신치료사 하워드 페인 박사와의 면담에서 의사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좋은 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자, 오스카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요?”라고 되물어 확인한 다음, 의자를 걷어차고 그의 서류를 마룻바닥에 내팽개치면서 고래고래 “아니! 있을 리가 없잖아, 이 개새끼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대신 아빠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책의 많은 부분은 집에 놓여있던 파란 꽃병 속의 열쇠, 그것에 맞는 자물쇠를 찾는 일에 할양한다. 우연히 꽃병을 깸으로써 조그만 봉투에 담긴 열쇠를 발견하긴 했지만 용도도 모르고, 어디에 써야하는 지도 모르며 오직 아빠가 봉투 위에 직접 쓴 블랙Black이란 단어 하나를 단서로, 아이는 뉴욕의 모든 블랙 씨를 면담하는 장도에 나선다. 어디에 맞는 열쇠일까. 책의 본문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냐타나서 끝날 때까지 가장 자주 나오는 사진이 등장하는데, 바로 문의 손잡이다. 그럼 혹시 이 열쇠가 손잡이, 문을 열 때 쓰는 용도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는, 열쇠의 모습이 손잡이에 맞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 수 있지만, 넓게, 책 전체를 아울러 2차 세계대전의 드레스덴 공습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21세기의 언더그라운드 제로를 통하게 만드는 문을 열 수 있는 기재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드레스덴, 히로시마와 뉴욕의 재앙과 재앙의 피해자는 “믿을 수 없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애나가 죽은 후, 애나의 동생과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한 말 못하는 토머스. 몇 년 후 그는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40년 동안. 그러나 아내와 아이와 완전히 이별한 건 아니어서, 토머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면 없는 시간을 만들어 자신과 대양 하나를 두고 떨어져 사는 얼굴 본 적 없는 아들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다 2001년 9월 11일이 지나고, 며칠이 더 지나고, 신문에 난 희생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이 들어 있는 걸 알고 대양을 건너온 토머스는 40년 만에 아내를 만나고, 아들 대신 손자 오스카를 만난다. 가방 하나 가득하게 든,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든 토머스. 그는 그토록 많은 편지를 어떻게 했을까.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와 뉴욕에서 날벼락을 맞은 보통의 인간들을 완전히 정치색을 배제한 채 비극과 충격의 증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
 이이의 다른 책을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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