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4일 부터 6월 16일까지 읽은 책 가운데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칭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공감하고, 감동하고, 재미있었고, 숙고해볼 만하고, 새삼스레 사람살이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었으며 그리하여 읽기에 즐거웠던 책들을 소개합니다. 개인의 호오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만 그게 또 사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혹시 책을 고르실 때 조금 도움이라도 된다면 제게도 참 고마운 일일 겁니다. 순서는 읽은 차례이며, 원본의 초간 발행 순서일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1.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

 

 '소설 읽기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뒤마와 위고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거의 누구나 소년시대에 축약본이나 만화로 본 적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한 번 읽어보시면 전체에 깔려있는 음모와 드라마의 진행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세 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금세 뚝딱 읽어치울 수 있을 겁니다. 진정한 팜 파탈의 전형을 구경하는 것도 이 책의 대단한 즐거움이고요.




 2. 알렉시 드 토크빌,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보다는 혁명 전 시기, 즉 앙시앵 레짐이 권력 안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나 문제와 해결의 방법을 체제 내에서 찾지 못한 정치가와 철학자들을 은근히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높은 압력으로 구체제 안의 제도와 프로세스를 뚫고 뿜어져나온 인민들의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불평등을 초래한 당대 전제정치의 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플로베르의 미완성 장편소설이며 희극입니다. 독후감에 저는 "희극의 힘은 대단하다. 진정한 슬픔이 없는 희극은 희극이 아니라서"라고 썼습니다. 두 필경사가 서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어, 난데없이 큰 돈이 생겨 귀향해 벌이는 촌극입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거 없는 두 중늙은이들의 인생의 석양. 그들이 씁쓸한 웃음으로 다시 필경의 업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가슴이 컥 막히는 희극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4. 헨릭 시엔키예비츠, <쿠오바디스>

 

  한때는 연말연시만 되면 TV에서 방영해주던 영화의 원작입니다. 영화를 봤으니 굳이 책은 읽어 무엇할까, 싶은 마음에 이제서야 그냥 별 생각없이 들춰봤더니, 하, 책을 읽어보지 않고 흘려보낸 세월이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는 모습을 보는 베드로가 묻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청빈하고 순종하고 정결했던 초기 기독교를 충분히 공감하며 읽었던 한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5. 제임스 M. 케인,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이것 역시 예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현대 소설은 뭐 별로겠지, 라는 선입견에 오래 빠져있어서 여태 읽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괜찮은, 아니, 저하고 궁합이 맞는 작품이었습니다. 얼핏보면 로드 무비일 수도 있고, 케루악 류의 비트 문학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 다 놔두고 재미있는 치정 소설로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이 언제나 고상한 건 아니잖아요?




 6. 아서 밀러, <모두가 나의 아들>

 

 가족간의 기다림과, 사회적 정의가 가정에 끼치는 파편에 대한 드라마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희곡을 이리 단순하게 얘기하는 건 참으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희곡을 읽는 재미는 머리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의 무대를 만들어 연출을 해보는 일인데, 이 책은 가족간의 갈등이 다방면에 걸쳐 등장하여 다양한 드라마와, 결국에 가서는 어쩔 수 없는 회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30대 초반에 썼는데도 나보코프 특유의 말장난과 인용, 패러디 등등. 이런 성향이 너무 강해 번역서에서는 제대로 그 맛을 알고나 있기는 할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선배작가는 도스토옙스키. 특히 <죄와 벌>, <악령>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터이고요. 내용은 뭐 말도 되지 않는 범죄행위를 구상하고 실현하는 것이지만 그걸 핑계로 창작을 하는 작가의 지옥불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8. 아르카디/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마치 중류 정도의 가족이 차를 몰고 캠핑을 가서 때려먹고 놀다가 온 장소처럼, 13년 전에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놀러와 한 판 잘 놀다 쓰레기를 남기고 떠난 것을 전제로 합니다. 미개한 지구인들은 외계 생명체가 흘리고 간 것들이 어떤 영향을 주고, 무슨 기능을 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것들을 엄정하게 관리하는 가운데 도굴을 직업으로 하는 집단도 생긴답니다. 아주 재미난 착상으로 펼치는 상상력의 개가. 역시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짓궂은 솜씨입니다.




 9. 카를로스 푸엔테스, <미국은 섹스를 한다>

  

  지금 절판이며, 원래 제목은 <다이아나>입니다. 한글 제목을 참 더럽게 지어놓아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입니다. 무대는 1969년에서 1970년으로 넘어가는 12월 31일 밤. 미국은 마틴 루터 킹, 케네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말콤 X를 잡아먹고 거친 오른쪽 파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며 베트남에선 유사이래 최초의 패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미국에서 온 달의 여신 다이아나와 연애를 벌이는 푸엔테스. 제목이 후져서 그렇지 가히 푸엔테스 최고의 작품입니다.




 10.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오늘 소개하는 작품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수작. 아니, 명작의 반열에 까지 올려놓아도 별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거의 완벽하게 건조한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3부작. 3부 전체를 한 권으로 새로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일 수도 있고, 분열된 자아를 보는 한 인간일 수도 있는 형제 루카스와 칼루스. 독자들은 1부 첫 장을 넘길 때 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을 멈출 수 없지만, 하도 재미 있어서 그런 건 하나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근데 재미만? 아닙니다. 명작의 반열에 올릴 정도라니까요.




 11. 에두아르도 멘도사, <구르브 연락 없다>

 

  이것도 외계 생명체 이야깁니다. 멘도사 책 가운데 처음으로 범죄소설이 아니군요. 외계인이 UFO를 타고 지구에 상륙해 모습을 지구인과 똑같이 바꾸고 이름을 구르브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도무지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화자 '나'는 키 170cm, 두개골 크기 57cm, 눈알 두개에다가 꼬리 없는 여자로 변신하여 구르브를 찾아 나서서, 온갖 난처한 사태를 만나는 얘기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멘도사 작품의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새삼스레 뭔 깊은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항상 무거운 책만 읽으면 사람, 겉 늙습니다.




 12. 마이클 온다치, <잉글리시 페이션트>

 

 저는 이 책에서 가장 깊은 관심으로 읽은 장면이, 영국인의 사랑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 출신의 공병 폭발물 처리반으로 등장하는 시크교도 출신 공병 중위입니다. 왜 유색인종인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렸는가 하는 항의의 표현으로 탈영을 해버리는 장면입니다. 그는 단언하지요. 백인 국가에는 그런 무시무시한 폭탄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번역한 한글 문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13.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대박입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가 횡재한 느낌입니다. 가히 로스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날 로스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화자의 청소년 시절에 멘토로 삼은 공산주의자의 일생을, 화자와 그 공산주의자의 형이며 화자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기도 했던 90세 은사와 지난 날을 회고하는 장면입니다. 1976년대 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장악했던 우파에 대한 비판과 로스의 책답게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도 가미된 수작입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미국은 섹스를 한다>와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좀 더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 책이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14.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짧은 소설입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제가 지난 날을 회상합니다. 그와 그를 둘러싼 칠레 지식인들의 허위에 찬 가식을 적나라하게 들려줍니다. 볼라뇨가 하는 말이 전부 반어법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장기가 훼손당하고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고문대 바로 위의 볼룸에는 술과 여자가 넘치는 파티가 벌어지며, 대통령 궁이 군대에 의하여 폭격을 당한 다음날 아침, 세상이 참 조용하구나, 평화로워, 라고 읊는 사람들의 초상. 볼라뇨, 처음엔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읽어볼수록 점점 끌리는 매력을 지닌 작가입니다.




 15.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천국은 다른 곳에>

 

  이것 역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책입니다. 그러나 품절이라 중고책방을 뒤져야 하지만 충분히 그 정도의 노고를 바쳐 마땅합니다. 미친 네덜란드 환쟁이 고흐의 아뜰리에를 떠나 타히티에 정착한 고갱. 매독으로 종양이 퍼져 다리를 절뚝이고 나중엔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인생의 마지막으로 불태우는 예술혼, 그리고 고갱의 외할머니이자 맹렬 사회주의자이며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말년을 생생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데 품절이라 아깝습니다.




 16.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파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한 지붕을 이고 사는 두 천재 여성의 만남. 한 명은 못생긴 쉰네 살의 수위, 또 한 명은 일찌감치 인생은 투명한 어항 속의 금붕어 이상이 아님을 알아채 오는 6월, 십삼 세가 되는 생일날 자살을 거행하기로 결심한 열두 살 소녀. 이들 속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돈 많은 은퇴한 일본 남성. 가난하고 못난 여성이 과하게 똑똑한 것은 사회생활 하는데 방해만 줄 뿐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수위의 은둔을 알아챈 소녀와 남성이 서로 맺는 따뜻한 연대가 어떻게 될지는 직접 확인을 하셔도 좋을 겁니다.




 17. 존 맥그리거, <개들조차도>

 

  읽기 거북할 수 있습니다.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된 시체를 집 밖으로 내오고, 시체 공시소에 저장하고, 꺼내 부검하고, 장례를 치루는 것까지 상세하게 묘사해놓았습니다. 친지와 가족이라고는 마약 중독자들 뿐이고, 결코 존엄하지 않은 시신만을 남긴 인물은 지독한 알콜 중독으로 자연사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루저들이 만들어내는 인생도 존중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의 삶도 전혀 의미가 없는 삶은 아니니까요.




 18. 이병률, <찬란>

 

 개인의 독백이나 과도한 물기 또는 남발하는 은유가 판을 치는 시집들 가운데 이런 시집을 하나 고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시로 말하자면 최고의 미덕은 시인이 뭘 노래하는지 독자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씩 궁상맞고, 쓸쓸하고, 마음이 저린 이병률의 시들을 읽으며 참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완전 아마추어, 잘 봐줘도 딜레탕트에 불과한 한 독자가 두달 여에 걸쳐 읽은 책 가운데 좋은 느낌으로 읽은 것들을 추려본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자면, 혹시 이 감상문을 읽는 분들의 의견과 달리하는 것들을 발견하신다 해도 그냥 평범한 독자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해하시어 심하게 까탈을 잡지는 말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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