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식당 창비시선 356
김성대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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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작가 김성대가 ①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았으며, 이어 ②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으로 다른 시인도 아니고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데다가, ③ 창비시선의 356번째 시집이기 때문이었다. 즉, 창비에서 등단해 김수영문학상을 받았고 다시 창비에서 낸 시집. 김수영과 창비의 교집합. 이것이 내게 무슨 뜻이었는가 하면, 적어도 시 하나를 읽기 위해 고단위의 문학적 수련 내지는 ‘내공쌓기’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이었다. 김성대는 자신의 시집에 든 모든 노래들 속에 나 같은 보통의 독자들은 애초부터 해독 불가한 암호 또는 기호들로 가득 채워놓았다. (이리하여 창비 역시 기어이 창비만의 색을 포기한 거디냐?)
 그나마 조금 이해했다고 착각할 수 있었던 시는 <이안류 3> 정도.




 이안류 3
 1999년의 사진


 

 눈 속에서 실핏줄 하나가 끊어진다


 플래시가 터졌을 때 누군가의 눈과 마주쳤다
 불현듯 결빙된 얼음 같은
 눈 속의 종소리


 눈을 돌리지 못한
 아직 쏟아지지 않은 빛이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인데


 역광이 고이는 내 눈 속의 인화
 유성 속을 떠도는 그늘처럼
 어느 시간을 번지고 있는지

 

  *


 눈 속에서 종소리 하나가 해빙된다
 지금의 내 눈과 마주쳤던 것이다
 사진을 보는 나의 눈을 인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번져올 것 같은 충혈이
 눈을 돌리지 못하고
 같은 눈으로 붉어지는


 나의 나의 운석이 되어가는 것일까
 사진 속의 그늘이 흘러나와

 눈 속에서 실핏줄 하나를 놓친다    (전문)




 누구나 경험해봤을 적목赤目현상. 사진을 찍을 때 주위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의 눈동자가 빨갛게 나오는 것을 말한다. 어두운 곳에선 홍체가 활짝 열려 있는데 갑자기 플래시가 터져 밝은 빛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오면 빛이 눈알 저 뒤편에 있는 망막의 실핏줄에 반사되어, 눈동자가 빨갛게 현상된 사진, 누구나 한 장 이상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플래시가 터졌을 때 누군가의 눈과 마주쳤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한 순간, 플래시의 환한 빛이 피사체의 망막에 반사되는 짧은 순간에 “불현듯 결빙된 얼음 같은 / 눈 속의 종소리”를 듣는다. 1999년, 세기말 어느 저녁, 역광에서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무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종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시인이다. 안구 속을 울리는 종소리.
 이안류離岸流. 골치 아프게 사전 뒤져볼 것도 없다. 해수욕 시즌만 되면 1년에 한 명쯤 골로 보내는 파도. 파도는 파돈데 바다에서부터가 아니라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거꾸로 쏟아지는 파도. 여기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얕은 바다에서 먼 바다 쪽으로 확 휩쓸려버리게 된다. 해마다 한국방송 9시 뉴스에 나오니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여름에도 유심히 들어보시라.
 그러니까 플래시에 반사되어 붉게 보이는 실핏줄들의 반사를 거꾸로 흐르는 파도와 유사하다고 보는 건데, 나는 이의 없다. 또 사실 그리 시 애호가도 아닌 내가 이의가 있건 없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이 시집 <사막 식당> 안에서 내가 이해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가 이거 하나 정도. 나머지는 처음에 말했듯 오리무중의 암호와 기호로 도배가 되어 있다. 또는 그런 거 같다. 불행하게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암호해독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눈사람
 오늘의 눈이 녹는 동안 어제의 눈이 쌓인다. 어제의 메아리에 내려앉은 새들은 날개가 얼었다. 영하의 거울 속에서 초인종이 울렸고 올빼미의 눈을 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다. 첫 발자국을 향해 몇광년을 건너온 눈사람의 속도로. 절대영도로 이루어진 고집스런 녹는점으로. 사내는 겨울을 깁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가만히 목격되어 있을 발자국들로 자신의 액자가 되어가는.



 시 <겨울 SF>란 시의 부분이다. 첫 문장부터 예사스럽지 않다. 시제가 바뀌었다. 오늘의 눈이 녹는 동안 어제의 눈이 쌓인단다. 여기에다 갑자기 날개가 언 새들, 그것도 어제의 메아리가 내려앉은 새들이 등장하고, 초인종이 울리고 올빼미 눈을 한 사내가 또 등장한다. 올빼미 눈이 말하는 건 어떤 걸까. 원형의 눈에 눈동자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거? 근데 뒷문장하고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첫 발자국을 향해 몇 광년을 건너온 눈사람의 속도라니. 누가 왔지? 아니다. 눈이 쌓이는 속도를 얘기하는 거 같다. ‘몇 광년을 걸어온 눈사람의 속도’로 어제의 눈이 쌓인다는데, 또 절대영도 그러니까 영하 273도로 이루어진 녹는 점.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온도. 그게 영하 273도. 유클리드 물리학 상 모든 존재가 무無로 사라지는 온도다. 그러니 나 같은 보통의 독자들은 김성대의 시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배워먹은 것이 없다. 저 구름 위에 노니는 이런 시인들의 뜻을 어찌 뱁새가 알랴.
 심지어 해설 <눈사람의 탄생>을 쓴 장은석조차, “시인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우선 특정한 감각적 체험을 공유할 수 없는 나머지들이 천천히 섞이도록 놓아둔다. 그런 다음에 일치 불가능한 사태로부터 다른 잠재적 힘이 도래하도록 계속 자세를 바꾸며 그들을 북돋운다.”(139쪽)라고 했다. 물론 시집 뒤편에 달려 있는 해설은 당연히 주례사다. 평론가인 장은석조차, 시인은 독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 집중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특정한 감각적 체험을 공유할 수 없는” “일치 불가능한 사태로부터 다른 잠재적 힘이 도래하도록 자세를” 바꾼다고 했다. 참, 나, 원. 문학평론가조차 공감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상태를 전달하는 것으로 현대시는 진화했나보다. 그것이 또 어떻게 읽으면 바람직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평론가의 말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일치 불가능한 사태로부터 다른 잠재적 힘이 도래하도록 계속 자세를 바꾸며”? 시 쓰는 게 뭐 섹스 하는 거야? 잠재적 힘까지 몽땅 끌어낼 수 있도록 계속 자세를 바꾼다니, 얼핏 읽으면, 시 쓰는 게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섹스(공감할 수 없는 체험을 공유하는 행위)를 위하여 자꾸 체위를 바꾸는 것같이 읽히는 건 비단 나만 그런가?
 시인과 시집과 시들을 오해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책의 가장 뒤편에 있는 “시인의 말” 가운데 한 부분을 가져온다.


 

 하나의 밤이 들어가서 닫힌 방
 그 방의 무한한 위치들
 우리의 전야는 반복되기만 해
 우리라는 미간을 띄워놓고도
 어느 얼굴이어야 하는지 모른다
 닮아본 적 없는 그것은
 계속 사라지고 있고
 계속 도착하는 하나의 창,


 ‘밖을 봐요. 섬이 하나 늘었어요.’


 다른 밤으로는 열리지 않는 미간의 기후를
 한쪽 눈을 불어주던 10시와 2시 방향 사이를
 다 살아볼 수 없다
 다시 살아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자신의 방에서 결코 방을 나서지 않는다. 방 안에서 모든 것을 반복시키고, 사라졌다가 도착하기도 한다. 세상을 향한 오직 하나의 틀은 창 하나.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은 기껏해야 시계바늘 10시와 2시 사이의 예각일 뿐이다. 이렇게 지극한 개인의 시각으로 쓴, 시인이 장착한 암호와 비의와 은유를, 한낱 독자밖에 안 되는 내가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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