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한 권을 낳기 위한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키의 삶은 뜨겁고 짧았다.”
이 책을 번역한 김규종은 책 표지의 뒷면에 이렇게 썼다.
일찍이 빠벨 꼬르차긴의 삶보다 더 치열한 그것은 보질 못했다. 20세기가 이제 막 그 폭풍을 열기 시작한 1904년, 우클라이나의 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창조주 오스트로프스키의 삶과 비슷하다. 다만 책에서는 소년 빠벨 꼬르차긴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80년 초. 한반도의 남쪽에서 큰 기운이 뻗어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하여 백가쟁명, 자신의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허용되기 시작했을 때, 한반도의 북쪽에 고향을 둔 작가들한테는 그러나 조심스레 자기 문학의 시발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또한 허용되었나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토양이자 거름이 된 선배 작가들을 꼽으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를 입에 담았다.
오스트로프스키? 그 사람이 누구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북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들이 감명을 받아 이미 귀밑머리 허연 늙은이가 되었을지언정 결코 잊지 못하는 한 편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 서슬 퍼런 반공의 세월 속에서 말이지.
그러나 그 작품의 내용도, 줄거리도, 하다못해 경향도 알지 못하면서 금강석의 강도로 대뇌에 박혔던 책의 제목,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누군들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 모르지 않을 터. 섭씨 천 도를 넘나드는 불길 속에서 벌겋게 달궈지고, 모루에 얹혀 쇠망치로 두드려 맞으며 깡깡깡…. 귀 속의 달팽이관을 통한 파장이 등뼈 까지도 저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비명을 질러야 비로소 강철은 나관중의 입을 통해 청룡언월도가 되고, 앙드레 말로의 펜을 거쳐 중국 혁명 당시 한 무정부주의자의 암살용 권총이 되며, 신경림의 노랫가락과 더불어 땅을 파는 쟁기며 호미가 되는 것.
그러니 책의 내용은 한 불굴의 투사가 징글맞게 끈질긴 시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해나가거나, 아니면 처음에는 비록 소시민적 안온함에 길들여졌던 사람이 시련을 통해 강인해지는 내용일 거라 짐작 정도는 했을 거였다.
그렇게 10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혼자 흐르지는 않는 법. 인간사, 인간사들이 모인 세계사도 세월에 맞춰 유구하게 흘러가는데, 세상에나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고 그 잔해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더니 이윽고 100년을 지켜오던 볼셰비키가 끝장이 나버렸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80년대에 청춘을 비켜간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은 한 여류작가로 하여 등푸른 생선을 생산하게 만들고, 그 등푸른 생선 때문에 장안의 종잇값이 천정을 모르게 치솟기 바로 전, 비로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오스트로프스키의 유일한 작품 <강철은….>의 번역과 출판을 허용했다.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 읽었다, 하면 붙잡혀가는 책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갈지 모르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이 책의 한글판을 읽을 수 있다면 일숫돈도 아깝지 않았을 터. 아… 빠벨 꼬르차긴.
1980년에 한반도의 남녘에서 있었던 대단히 불행한 사건. 그 사건을 토대로 무수한 문학작품을 우리의 현대사는 만들어냈다. 홍희담의 불꽃 같은 소설 <깃발>을 떠올리며 혹시 홍희담은 지하, 그러니까 당시 언어로 말하자면 언더에서 그는 오스트로프스키를 읽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단정한 사람은 비단 하나 둘이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빠벨 꼬르차긴은 치열하다. 그리하여 빠벨 꼬르차긴에게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종교.
그리고 또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 읽는다. 무릇 세월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이거늘 15년 전의 빠벨 꼬르차긴이 오늘의 그와 과연 다를 것인가.
빠벨은 그대로이지만 시정이 변했구나. 오늘 이 땅의 노동자들을 보고 빠벨은 통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헌신에 대한 보람을 얻겠는가. 타락한 노동이여, 타락한 노동자여.
그는 한반도 남쪽에 유령으로 내려와 2006년, 어떤 지양점을 가리킬 것인가. 혹시 100년 전의 자본가보다 더 탐욕스러운 노동을 보지는 않을지, 그래서 속 깊은 울음을 처음으로 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기 전에 관련된 정보의 모든 것을 차단하시기를…. 신문서평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책 표지조차 읽지 말고 곧바로 첫장을 넘기기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