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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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1936년생. 이 책을 쓴 시점이 2003년. 67세. 이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여 심지어 83세인 올해, 2018년에도 <이웃>이란 작품을 썼다, 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이렇게 생겼다.

 

 외국 작가들 보면 도무지 은퇴란 걸 모른다. 어느 시점이 되면 글을 쓰는 힘이 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은퇴할 시점이라고 조정래의 어느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다. 그건 우리나라 작가들한테만 해당하는 건가?
 아무튼, 이 장편소설 <천국은 다른 곳에>. 요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을 읽어보면 1973년에 이미 발표한 <판탈레온 특별 봉사대>에 나오는 종군 위안부 부대는, 이 양반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종군위안부를 모티프로 삼아 썼나 싶었는데, 아니다, 1834년 페루 내전 당시 세계 최초로 군인들의 처나 애인, 창녀 등을 모아 정규군으로 편성한 위안부대가 정말로 있었으며, 남편이나 애인이 총에 맞아 전사하면 그들의 무기를 대신 잡고 아주 용맹하게 전투에도 임했다고 나온다. 요사의 작품을 크게 두 개로 분류하자면 이른바 정치소설과 에로티시즘 소설로 나누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책은 다분히 정치 소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무대는 라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프랑스의 공산주의 운동이다.
 여기에 흥미롭게 등장하는 여인이 플로라 트리스탕. 실제 인물이다. 이 꽃(플로라) 트리스탕은 이렇게 생겼다고 구글 이미지에 나온다.

 

 

 스페인 아빠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 태어났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엄마 아빠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해 사생아 신분으로 떨어진 여자. 만 18세가 되어 열 살 많은 인쇄업자 앙드레 샤잘과 혼인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는다. 맏이는 죽고, 둘째는 샤잘이 키우고, 셋째 딸을 엄마에게 맡긴 다음 진짜로 대서양을 건너 페루로 가 삼촌 돈 피오 트리스탕을 찾아 친족관계를 증명해달라고 하는데, 페루의 대표적 부자이지만 원래부터 쪼잔하기 이를 데 없는 삼촌은, 만일 친조카임을 증명해주면 플로라에게 거액을 상속해줘야 하는 부담 때문에 그냥 넌 사생아일 뿐이야, 라고 단칼에 물리친다. 네이버 인물백과에 나오는 얘기다. 소설 속에선 딸을 어머니가 아니라 여동생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는 그냥 넘어가자.
 더 놀라운 것이 19세기 초중반에 여성해방과 노동조합 운동에 몰두하던 그녀가 41세 되던 1844년, 프랑스 전국을 혼자(19세기 중반에 여성 혼자 여행하는 자체가 이미 큰 센세이션이었던 건데) 순회하며 자신의 운동과 신념을 널리 퍼뜨리기로 작정을 하고 전국공연에 나섰다는 거. 그리하여 디종, 리옹, 생테티엔, 아비뇽, 마르세유, 툴롱, 님므, 몽펠리에, 베지에르, 카르카손느, 보르도 등지를 다니면서 궁극적으로 노동자와 여성의 연대를 통한 해방을 주장하고 다닌다. 숱한 동조자와 비난자, 그리고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가며, 태생부터 인간 말종이었던 남편이 쏜 총알을(빼지 못해) 심장 옆에 달고 다니면서 대장암이 자궁과 척추까지 번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이는 왈가닥 아줌마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프랑스를 누비게 된다. 이 플로라 트리스탕의 활약과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책의 절반. 홀수 장章은 온전히 이이에게 헌정하는 바르가스 요사. 근데 더욱 놀라운 것은, 플로라(꽃) 트리스탕이 또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라는 거. 나는 플로라 트리스탕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혹시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들었을지도. 그러나 곧바로 잊었겠지), 이이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로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운동에 헌신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거의 고갱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도 이 비슷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머지 짝수 장章은 바로 고갱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고갱의 자화상. 1888


 아시다시피 ‘미친 네덜란드 환쟁이 놈’과 몇 주에 걸친 동거 또는 작은 공동체 생활 끝에 유럽문명 대신 원시의 발랄함이 아직 거세되지 않은 신천지를 찾아 남태평양 타히티로 거처를 옮긴 고갱. (타히티와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를 혼동하지 마시라. 둘 다 프랑스의 식민지였지만 거리는 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있다) 거기서 열세 살 먹은 작고 발랄하고 똑똑한 현지인 아가씨 ‘테하마나’와 중혼을 하고 얻은 이름 또는 별명이 ‘코케.’ 책은 ‘폴’과 ‘코케’가 번갈아가며 마구 쓰이는데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결코 헛갈릴 일 없으니까. <달과 6펜스>에서 미리 감을 잡았다시피 잘 나가는 파리의 증권 딜러로 부르주아의 삶을 즐기다가, 결코 화가가 될 소명의식도 없이 우연한 기회에 별 볼 일 없는 화가와 친하게 되고 그이와 어울려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좀 하다가 처남한테 준 습작 가운데 하나를 출품했더니 덜렁 최우수상을 먹어, 그것도 팔자지, 그때부터 미쳐 돌아가기 시작하다가, 마누라와 아이들은 친정집 코펜하겐으로 도망가 버리고, 거기까지 따라가 처갓집에 빌붙어 살다 쫓겨나 그야말로 19세기 식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 화가의 삶으로 진입한 고갱. 그가 1892년 4월, 화폭으로 쓸 천 100야드, 그림, 유화물감, 붓, 뿔나팔 하나, 만돌린 두 대, 기타 한 대, 브르타뉴 지방 담배물부리 여럿, 권총 한 정, 입던 옷가지 몇 벌만 챙겨, 아참, 이것도 있다, 책에선 “입에 담기 거북한 병”이라고 묘사하며, 기어이 그 병의 후유증으로 다리에 온갖 염증이 생기고 눈도 멀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갈 매독까지 함께 짊어지고 배에 오른다. 그곳에서의 생활과 과거 ‘미친 네덜란드 놈’ 고흐에 대한 애증과 “관념 속에서의 화해”와 스스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까지의 생활과, 예술을 하는 고난에 대한 회상을 빼곡하게 채워 놓았다.
 바르가스 요사는 플로라 트리스탕과 폴 고갱 사이의 관계 또는 이어짐에 관해 억지로 말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독자는 외할머니의 혁명과 해방에 관한 지독한 집념과 외손자의 예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숨기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일찍이 1997년에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그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설명한 바 있는 요사는 이 책에선 고갱의 그림들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는 (과하지 않은)설명을 해주었으나, 전작과 달리 책 속에 그림을 삽입하지 않아 안타까웠던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혼란스러운 정치판이 아니라(물론 페루 내전에 관해 약간의 페이지를 할애했으나 그건 조족지혈) 유럽, 특히 프랑스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에 관한 정치적 관점에다 고갱의 그림을 중심으로 요사의 예술관까지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글쎄 몇 명이나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요사의 책들 가운데 최상급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출판사 ‘새물결’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책이 품절이라니. 혹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좋아하시는 분들 계시면 얼른 <세상 종말 전쟁> 개정판을 구입하시라. 난 구판, 거의 마지막 고객으로 비싼 값 주고 샀는데, (혈압 오른다!) 이젠 “정가인하” 타이틀 달고 반값으로 나왔다. 어쨌든 이 책의 조속한 중쇄를 기대하고, 가능하면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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