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 바디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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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영화. 오래 전, 연말연시에 연휴 3일 있던 시절, 연휴 기간에 TV만 틀었다하면 어느 채널이건 간에 일 년에 한 번은 구경할 수 있던 영화. 로버트 테일러와 데버러 커가 주인공 비니키우스와 리기아 역할을 했던 바로 그거. 근데 <쿠오 바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에 다 본 기억이 없다. 하도 오랜 세월 조금 조금씩 보다보니 장면이 연결되어 마치 다 본 것처럼 착시를 일으켰던 것. 영화 자체도 그리 재미가 없었던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마 그랬던 거 같다. 그리하여 <쿠오 바디스>를 여태까지 작가의 이름은 모르지만 스페인 사람이 썼을 거라고 짐작해왔던 것인데(왜 스페인이라고 생각해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놀랍게도 폴란드 작가의 작품이다. 그것도 1905년이긴 하지만 어쨌든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내겐 철저하게 무명씨인)헨릭 시엔키에비츠. 이 책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129호. 비교적 앞 번호라 초판이 2005년 12월. 내 책은 2009년 8월 초판 5쇄. 일단 5쇄니까 좀 팔린 책이란 얘긴데 왜 난 읽을 생각을 여태 하지 않았을까. 암만해도 영화 탓인 거다.
 아직 이 책 안 읽어보신 분, 거수. 놀라지 마시라. 겁나 재밌다. 두 권에 1천 쪽 넘는 분량인데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고 가정해도 이틀 동안 밤마다 쐬주 한 병 마실 수 있다. 한 번 책을 들었다하면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얼굴에 물만 칠하고 읽기 시작하면, 때 돼서 밥만 먹고 오후 일곱 시까지 하루에 한 권 독파 가능. 내 연세에 눈이 침침해 나흘 걸렸지 그거만 아니었으면 이틀이면 뚝딱 해치운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아시겠지?
 남자 주인공 로버트 테일러 비니키우스는 옛 집정관의 아들이면서 장교로 오랜 소아시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청년. 귀향 도중에 약간의  부상을 당해 은퇴한 장군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집에서 치료를 받느라 세월을 좀 죽이는데 (폴란드 민족임을 은유하는)북부 유럽의 친 로마 성향을 띤 리기족族에서 인질로 와 훌륭한 아울루스와 정숙한 폼포니아 그레키나 부부의 양딸 정도로 잘 자란 아가씨 ‘리기나’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다친 것을 다 치료하고 이제 로마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 페트로니우스를 방문해 리기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 고민을 털어놓자, 삼촌이 직접 아울루스 장군을 방문하여 리기나를 품평한 다음, 곧바로 황제 네로를 찾아가 리기나는 인질로 로마에 와 있는 것이라 황궁에서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고하여 아가씨의 충실한 자유인 신분의 하인 우르수스를 동행해 입궁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여기서 주인공 비니키우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또 다른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외삼촌인 페트로니우스(1권 표지에서 나신의 여자가 키스를 퍼붓는 조각상의 주인공이 바로 페트로니우스). 애초부터 종교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책, 페트로니우스 한 명을 읽기 위해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 이 정도로 소개할 수 있는 사람. 다시 한 번 얘기하는데, 난 정말로 종교, 특히 기독교에 관해선 관심이 없다. 그래서 서양 역사에 가장 큰 비극은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와 분방하고 자유스럽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헬레니즘 문화가 뚝 부러졌다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페트로니우스, <쿠오 바디스>의 진정한 영웅이자 주인공인 이 인물이 헬레니즘의 축복을 받은 마지막 인물 비슷하다. 시, 음악, 연극 등에 달통하고, 세 치 혀를 적재적소에 촌철살인으로 날릴 줄 알고, 뛰어난 인물 중에서도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이. 네로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당대 유일한 인물.


 “폐하. 앞으로 만수무강하시더라도 제발 대중 앞에서 노래는 하지 마십시오. 양민을 학살하시더라도, 아무튼 시는 쓰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들을 독살하시더라도, 부디 춤은 추지 마십시오. 또다시 불을 지르시더라도, 부탁이니 그 서투른 키타라 연주는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폐하의 벗이자 ‘고상한 판관’인 페트로니우스가 폐하께 드리는 충고입니다.”


 내가 비록 종교엔 아무 관심도 없지만 이 책에서 묘사하는 초기 기독교를 읽고 느낀 것이 많았다. 한 마디로 숭고함. 희생. 헌신과, 무엇보다 사랑.
 카타콤. 그리스에서 온 다신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비의적秘儀的 진리를, 위로는 위성국가의 공주님부터 로마 집정권의 아드님에 이어 저 아래로 노예들, 거기다가 황제의 근위병사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쳐 받들어온 기독교. 정확하게 얘기해서 AD 60년대 초기의 카타콤. 로마의 학정 속에서 미미한 카타콤을 기반으로 생명력을 이어온 기독교. 비록 유물론자를 자임하는 나는 종교란 '의식의 아편'임을 주장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위대한 종교.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정점에서 등장한 기독교. 또는 예수. 그래, 여기서도 문제는 권력이다, 권력. 주피터, 헤라를 위시한 숱한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의 다신을 모신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네로 시대. 전성기라 함은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얘기. 맞지? 서양세계에서 내리막길을 대체할 종교로 ‘사랑’을 얘기하는 기독교가 자리 잡은 것도 참으로 기막힌 행운이며, 그걸 넘어 기적이란 것. 이것도 맞지? (이 책에서 묘사한 작가의 모든 것이 옳다면)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순결, 순응, 청빈의 미덕이라니! 그러나 참 얘기하기 힘든데,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거.
 주피터를 정점으로 무수하게 나열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그들의 권력을 사용해, 카타콤에서 비롯한 겸허한 기독의 정신을 박멸하려 할 때가 전성기였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3세기 이후 근 1,700년 동안 기독교의 전성기 아니었나? 그동안 쾰른에선 무려 700년 동안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대성당을 건축하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오늘도 공사 중이다. 만일 기독교의 하느님이 정말로 있다면 그분이 쾰른이나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졌고 벌이고 있는 겁나게 화려하고 겁나게 비싼 건축물을 보고 정말 좋아할까? 대한민국에 모텔의 수만큼 많은 개신교 교회의 난립도 자신을 위한 봉헌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 시절의 그리스 로마 신들을 보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느끼지? 종교의 순결이 아니라 종교가 갖는 권력이 진짜 문제라니까. 교회의 권력, 교회 내에서의 권력, 다 마찬가지다. 어디서나 일단 권력을 갖게 되면 그까짓 겸손과 순결과 순응과 청빈을 뭐 하러 귀찮고 고생스럽게 짊어지고 다니겠느냐 말이지. (아직도 목자의 품에 안기지 못한 집 나간 검은 양 한 마리의 의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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