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바르와 페퀴셰 1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3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 책세상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연세대학에서 플로베르 연구로 석사와 박사를 한 전인혜의 역작力作이자 역작譯作. 일찍이 플로베르를 공부하면서 왜 하필 플로베르를 시작했을까, 후회하고 지루해지고 느슨해졌을 때 이 <부바르와 페퀴셰>를 발견하고는 눈이 번쩍 띄었다고 책 뒤편의 역자소개에 썼다. 그러면 적어도 이이의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한 애정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듯.
 내가 읽어보니까, 이 책은 한 번 읽어서는 제 맛을 알기 힘들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읽고 한 십 년 지나 다시 한 번 읽어야 이 우울한 명상형 은둔자 플로베르가 가난에 찌든 말년에 접어들어 마지막 작품으로 왜 이 책을 쓰고, 기어이 미완성으로 생을 마감했을지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겠다.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난 엉뚱하게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주제페 베르디가 여든 살이 넘어 자신의 마지막 작업으로 만든 셰익스피어 원작의 희극 <팔스타프>를 떠올렸다. 베르디와 동시대를 살다 간 플로베르도 자신의 마지막으로 슬픈 희극 <부바르와 페퀴셰>를 선택했다. 평생을 살고 이제 황혼이 찾아와 문득 돌아보니 그거야말로 정말 코미디, 한 판 웃긴 인생극이었더란 깨달음이라도 있었을까? 베토벤도 마지막 죽음의 침상에서 “여봐, 희극은 끝났어!”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잖은가. 이렇게 희극의 힘은 대단하다. 진정한 슬픔이 없는 희극은 희극이 아니라서.

 

 생 마르탱 운하의 두 수문이 있는 부르동 거리. 한 여름의 일요일에 두 사람이 나타난다. 바스티유에서 한 명이 오고, 다른 이는 식물원 쪽에서 걸어와 하필이면 같은 벤치에 앉아 똑같이 모자를 벗어 각자의 옆에 놓았다. 키 큰 사람의 모자 속에 ‘부바르’라는 글자가 씌어있고, 상대적으로 작은 남자의 모자 속엔 ‘페퀴셰’란 글자가 적혀있어, 이 두 싱거운 남자들은 동시에 아, 당신도 모자 속에 이름을 써 놓는군요. 이런 우연이라니, 이거 반갑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까운 곳에 가서 곱창구이에 쐬주나 한 잔 하실까요? 이런 절차를 밟아 친구가 된다. 한 잔 술에 마음을 터놓으니 참 이런 우연은 하늘이 만들어준 것이라 같은 필경筆耕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고, 나이도 마흔 일곱으로 같고, 부바르는 삼촌한테 종자돈을 얻어 상점을 차려 좀 여유 있게 사는 남자였으나 결혼하자마자 아내가 금고 속의 현금과 보석들을 홀랑 들고 꽁무니를 빼버린데다가 타고난 게으름 덕택에 지금은 홀아비 신세고, 페퀴셰는 여자 알기를 호환, 마마쯤으로 여겨 독신을 주장하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놀라지 마시라, 52세 넘어 까지 숫총각 상태를 유지하고 있게 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나이 마흔일곱이면 은퇴까지 삼년 밖에 남지 않은 상태인데, 은퇴를 하고 나면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시골에서 여유롭게 은인자적하고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책 2권의 384쪽엔 이렇게 설명을 해놓았다.

 

 “부바르는 항상 말horse과 모든 여행 장비, 부르고뉴 지방의 특급 포도원, 그리고 화려한 저택에 친절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소유하고 싶었다. 페퀴셰는 철학적인 지식에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특별한 사람들이 몇 있는데, 부바르도 그런 족속 가운데 한 명이라서 여태까지 삼촌인줄만 알았던 은인, 은인은 은인이지, 상점을 차려 그런대로 여유롭게 살게 종자돈 대준 사람이니까, 하여간 그 삼촌이란 사람이 알고 보니까 자신의 생부라는 거였으며,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생부가 죽으면서 유서에 그동안 직접 돌봐주지 못해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아 호적상 친아들 말고, 호적상 조카, 생물학적 맏아들한테 전 재산의 절반을 뚝 떼 주었다는 편지를 공증인으로부터 받았던 거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부바르는 부르고뉴 지방의 농장과 저택을 구입하고자 했으나, 아이고, 돈이 조금 모자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페퀴셰는 자신의 전 재산을 홀랑 보태 부바르의 꿈을 이루어지게 해주고 자신도 은퇴하면 곧바로 합류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부바르가 천성적으로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깟 삼 년도 남지 않은 은퇴, 지금 당장 해버리라고 강권하여 드디어 둘이 함께 칼바도스로 낙향하는데 성공한다. 칼바도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안개가 잔뜩 낀 한밤중에 돌다리를 건너다 우연히 마주 걸어오는 한 여인 조앙 마두를 만난 라비크가 주점에 들러 주문하는 술. “술을 주시오. 쓴 술을 주시오.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는 매우 쓴 술이 아니면 안 되오. 칼바도스로.” 1992년 잠실 롯데호텔 바에서 미친 척하고 칼바도스 한 병 주문해 조그만 한국 남자 둘이서 앉은 자리에 한 병을 다 마셔버리니까 옆 자리에 앉아있던 거구의 백인들이 멀뚱멀뚱 쳐다보던 바로 그 술. 쓰긴 정말 오지게 쓴 술이다.
 바로 칼바도스의 쓴 맛. 부바르와 페퀴셰를 기다리고 있는 전원생활의 맛이다. 제일 앞에서 이 책을 나는 ‘슬픈 희극’이라고 단정했고, ‘진정한 비극이 없는 희극은 희극이 아니다’라고 허튼 소리를 했다. 인생의 차분한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기 위해 부르고뉴로 내려온 두 장년. 이들이 장년을 넘어 노년에 이르도록 부르고뉴의 칼바도스에서 그들을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온갖 실패의 연속이다. 도착하자마자 토질과 토양을 핑계로 온갖 불평만 해대는 소작인을 해고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정원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당연히 과수원도 하려는 주인공들. 평생 사무실이나 상점에서 물건을 팔거나 필경을 해온 이들이 아무런 경험도 없이, 현지인들의 불순한 호기심어린 눈길에 싸여 시도하는 것은 농업, 화훼, 수목학 전문 서적. 철석같이 믿고 책에 나온 대로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가지치기를 하고, 피를 뽑고, 별 난리를 다 부려도 두 명의 도시인이 한 일 년 농사는 완전 폭망. 그들의 ‘은퇴 후 활동’은 이제 농사에서 화석과 지질학으로 바뀌고, 다시 문학과 연극으로, 병자에 대한 치유법으로, 하여간 온갖 방향으로 개구리 뜀박질 하듯 하는데, 독자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귀엽고 슬픈 실패들로 완전하게 점철된다.
 그래, 그게 사는 방법이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몇 번이나 여행했던 부유한 청춘이었던 플로베르가 이제 병상에 누워, 조카딸의 파산을 면해주기 위해 마치 고리오 영감처럼 선택한 자발적 가난에 허덕이며, 동네에 있는 마자린 도서관의 명예직에서 나오는 약간의 수입과 미미한 수준의 연금에 기대 마지막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부바로와 페퀴셰가 저질렀던 것처럼 완전한 실패의 연속에 불과했던 것. 자신의 눈엔 그렇게 보였겠지. 지나고 보니 그저 한 바탕 코미디로. 그리하여 미완성 유작이 출판된 지 130여 년이 흘러 작품을 읽는 저 아시아 변방의 사내도 부바르와 페퀴셰가 벌이는 칼바도스 맛의 실패를 보며, 그래, 그게 사는 거야, 오늘 밤에도 쐬주 한 병 해야겠다, 라고 마음먹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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